제27화, 꼰대가 개척하는 노예의 길

청계천 로망스

by 초부정수

며칠 전 부암동에서 이안은 평소와 달리 과음을 한 것 같다. 술과 술자리를 좋아하지만 과음을 하는 경우는 없었는데, 그날은 아무래도 부암동의 분위기가 그리 만들었던 듯싶다. 송병준과 같은 인물이 비틀어 놓은 시대에서 윤동주는 비틀리지 않으려 자신을 희생하는 대신 시대가 더 이상 괴물을 잉태하지 못하도록 시를 적었다. 그리고 그 시는 한국인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더 나은 시대를 만들어 왔다는 생각에 이안은 취했고 자기 자신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또 깨닫지 못하고 술만 마신 탓이다.


그날 마신 술을 생각하니 해장을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몸은 이미 해장이 되었으나, 마음은 아직 몽롱한 탓이다. 칼국수가 생각난다. 청계천 북측 길가에 있던 노포의 수육과 칼국수 집이 떠올랐다. 꽤 오래 전인 20세기에 다니던 직장이 을지로 입구역 근처에 있었던 이유로 가끔 가던 곳이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아직도 있다... 다음 주면 데이비드가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많아야 한 두 번 밥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필립에게 연락을 하니 저녁에 같이 오겠다 한다. 조금 일찍 오라고 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웨이팅이 길다는 후기가 많다. 식당도 복고가 유행인가...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기다리는 줄이 길어졌다. 급한 마음에 소주가 잘 들어가지 않는다. 20세기의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술맛은 좋은데 이거 공연히 눈치가 보이는구먼. 음식을 좀 더 시켜야 할까?"


"다 먹고 필요하면 시켜라. 이것도 다 못 먹는데 왜들 그래?" 데이비드는 한국 사람들은 대개 이런 경우에 친구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필립과 이안이 서두르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은 친구들의 반응을 이해하지만, 머리는 다른 말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선 것이 보이니까 마음이 괜히 바빠지네, 눈치 주는 사람은 없지만 어쩐지 좀 그래." 필립이 데이비드의 속 마음을 알아챘다는 듯 말 한마디를 거들지만, 사실 자신도 왜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일 것이라 애써 위안을 삼지만 그 또한 맞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들 그러는지 이해는 하지만 그런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봐."


"데이비드 너는 뭐 이런 사소한 것 가지고 그리 거창하게 썰을 푸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 있으니 불편하겠다 싶어 걱정한 것이 무슨 테러범의 마음이라도 된다는 거여?"


"테러범 이상일수도 있지. 우선 우리는 지금 그 어떤 규칙도 어기고 있지 않아. 첫째, 이 식당에는 식사 시간제한에 대한 규칙이 없고, 둘째, 오래 식사를 한다고 해서 추가 요금을 더 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셋째, 그만 먹고 나가야 한다는 규칙도 없는데 뭐가 잘못이지?"


"그건 그렇지만, 사람이 그렇지 않나? 내가 오래 앉아있으면 식당의 회전율이 떨어지고, 배고픈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고, 내가 천천히 먹는 것이 그런 차원에서 불공평할 수도 있어 결국 식당의 질서가 무너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수도 있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래서 내가 위험하다고 한 건데... 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가 그나마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와 경제 시스템보다 낫다고 생각하거든. 여기서 중요한 건 누가 설계하지 않아도 각자가 자기 판단으로 움직이면 질서가 생긴다는 것, 조금 유식하게 말하면 자생적 질서라는 것이 생긴다는 말이지. 명령이나 계획, 규칙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말이야. 역설적인 것은 지금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자생적 질서인데, 줄을 서 있는 사람들도 자생적 질서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지. 그런데 마음이 급해진다는 것은 결과를 너희가 전부 관리하려고 해서야. 그건 조금 과장하면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지."


"데이비드가 좀 취했나? 뭔 식당 줄 하나에서 전체주의까지 나가는거여? 술이 확 깨네.."


"뭐든지 큰 문제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는 법이여. 이게 사소한 문제 같아 보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당신들처럼 생각하면 어떻게 될 것 같어? 마음이 급해지는 순간 우리가 손님이 아니라 질서 관리자가 되려 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착각이고 오만이자 월권이라 할 수 있지."


"월권은 또 뭔 소리여?"


"너희들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까지 책임지려 한다는 거지. 다른 손님들이 얼마나 급한지, 이 식당의 평균 회전 시간, 그리고 식당 사장님이 감내하는 수준 등에 대한 정보는 전혀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압박하고, 스스로 시간을 줄이겠다고 하는 건 바로 자생적 질서를 침해하는 내면의 중앙 계획자일 수밖에 없지 않나?"


"오늘 뭘 잘 못 먹었나... 데이비드가 한국말을 굉장히 잘하네?"


"그 새 며칠 사이에 말이 많이 늘었구먼. 듣다 보니 뭔가 설득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하여간 정리하면 질서를 위해 착해지려 애쓰지 말고, 자기 위치에서 정직하게 행동하라는 그런 말이지?"


"그렇기도 하네. 배가 고프고 술이 땡기면 먹고 마시고,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으면 나누고, 추가 주문을 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나가면 된다는 말이구만. 그리고 질서를 유지하려는 선의의 조급함은 오히려 질서를 왜곡한다? 하이에크냐?"


"잘 알아들었구먼. 하이에크_Friedrich Hayek.. 솔직히 그가 이야기하는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이 뭔가 이해하기 조금 어려웠는데 오늘 너희들이 하는 말을 듣다가 갑자기 좀 이해가 되더라고. 질서라는 것이 내가 배려해서 유지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제자리에 있을 때 유지된다는 생각이지. 범죄자가 제자리에 있는 것과 달리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제자리에 있으려면 헛짓거리를 해서는 안되고 늘 그럼에도 옳은가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면 될 것이지. 윤동주처럼.. 아니면 우리 사회를 노예의 길로 몰아가는 격이야. 소위 꼰대문화가 이것과 비슷하지 않나?"


"데이비드가 윤동주에 아주 푹 빠졌구먼. 그런데 어째 껄쩍지근허네, 나한테 하는 말 같아서.."

이안은 꼰대라는 말이 어쩐지 낯설지 않은데, 문화라는 단어가 따라붙으니 또 다른 것에 생각이 미친다...


"지금 이 맥락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야기를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 이슈가 생각났어. 아무래도 안주를 조금 더 시켜야겠지?"


"소주 한 병 더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길 바람! 여기요 ~ 소주 한 병하고 홍어찜도 하나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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