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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에 남은 성형외과 환자분들

 - 수술실이란 극장 (Operative theatre) 14 화

  

 지금까지 마취를 담당한 대부분의 환자분이 암 환자였고 또한 기억에 남는 분들도 이러한 질환을 가진 안타까운 환자들이다. 하지만 성형외과 환자분들 중에도 암 환자분들 못지않게 주변에서 안타까워할 만한 환자분들이 있었다. 성형외과 수술이라고 하면 대부분 외모를 개선하는 수술로 생각하신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환자분 들 중 이런 분들은 매우 드물었고 사고로 다치신 분들이 대다수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다가 다시 직장을 구하다 보니 집에서는 먼 광명에 있는 병원에서 일 년간 일한 적이 있었다. 그 병원은 성형외과가 유명하였는데 특히 손가락 접합 수술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수술을 받는 환자분들은 대부분 기계를 다루시다가 손가락을 잃으신 분들이었다.


 인근의 공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었는데 한국 분들뿐 아니라, 중국, 필리핀, 아프리카, 러시아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진 분들이 오셨다. 손가락 접합 수술의 경우 한 번으로 끝나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 자주 전신마취를 받기도 그렇고 금식이 안 된 환자분들이 많아 팔만 마취하는 부위 마취를 주로 시행하였다. 


 수술 환자분들도 워낙 많아 대학병원처럼 수술실에서 마취를 시행하고 마취되기를 기다리기에는 수술실 일정이 빡빡하였다. 더구나 부위 마취는 완전히 마취되는데 적어도 30분 이상 시간이 소요되는 마취인지라 회복실에 환자분들을 쭉 뉘어 놓고 부위 마취를 하고 마취가 잘 된 것을 확인한 후에 수술실에 입실하였다. 그 병원의 마취과 의사분들은 우리나라에서 팔의 부위 마취에 대해서는 대가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일 수많은 환자의 팔을 마취해 오셨다.     


 부위 마취는 겨드랑이나 목에 마취 주사를 놓게 되는데 지금이야 초음파로 신경을 찾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나 그 당시는 신경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신경을 찾아 신경 주변에 국소 마취제를 투여하는 마취였다. 그러다 보니 환자분이 손의 어느 부위가 저린지 혹은 느낌이 이상한지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마취 성공의 핵심이었다.


 필리핀 출신 환자분은 그나마 영어를 하시니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되는데 중동, 아프리카 분들과는 대화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손짓 발짓해가며 어찌어찌 소통은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했었나 참으로 신기하다. 위생 상태도 좋지 않으셔서 마취 부위를 여러 번 소독액으로 닦아내어 묵은 때를 제거한 후 마취를 시작해야 했다. 


 타국에서 말도 통하지 않고 본인의 손가락은 너덜거리거나 잘려나간 젊은 청년, 장년의 남자분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워하는지... 본래의 얼굴색이야 대부분 검은색이었으나 그야말로 공포와 걱정으로 질리고 굳은 표정이었다. 그분들의 얼굴을 대면하면서 아픈 주사까지 놓아야 했으니 참으로 미안하였다. 하지만, 마취 주사를 잘 못 놓으면 또 다른 고통을 느끼셔야 하니 독한 마음을 품고 항상 주사를 놓곤 했다. 그분들이 빨리 배우는 언어들이 '사장님, 때리지 마세요' 나 '아파요' 등의 언어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아파요'는 모든 외국인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한국말이었다. 대부분 눈이 크시고 순박한 모습이고 겁먹은 표정들이어서 마취하면서도 가슴이 아리곤 했다.    


 외국인 노동자분들이 다치는 이유가 한국말을 잘 모르고 작업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투입되어서라고 한다. 그러니, 한국인 노동자분들보다 사고율이 높아 고용노동부의 통계 집계에 따르면 외국인 노동자의 산재 발생률이 1.16%인데 한국인 노동자의 비율은 0.18%라고 하니 거의 6배에 달하는 비율로 발생한다. 실제로 그 병원에서도 한국인 노동자가 병원에 오는 경우보다는 외국인 노동자분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전에도 화학 공장에서 베트남 노동자분들이 원인 모를 화재로 목숨을 잃으셨고 러시아분의 추락사, 우즈베키스탄분이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등 외국인 노동자분들의 산재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외국인 노동자 100만 명 시대라고 하는데, 안전 대책이 시급하다는 뉴스를 보니 과거 나의 경험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어릴 때 육아를 도와줄 이모님들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분들 중 연변에서 오신 이모님이 계셨다. 그 이모님이 아이들을 2년간 넘게 봐주시다가 중국에 있는 남편이 아프셔서 중국으로 돌아가시면서 본인의 언니를 우리 집에 소개해 주셨다.


 그 언니 이모님께서도 1년간 아이들을 돌보아 주셨다. 그 당시 불법 체류 노동자를 출입국 사무소에 의무적으로 신고하는 기간이 있었다. 물론 가정집에 일시적으로 계시는 분들의 고용주들은 이 신고에 무심하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고용주로서 이 정도는 해드려야겠다는 의무감에 새벽부터 줄을 서 신고를 해 드린 적이 있다.


 그 당시 정말 많은 외국인 노동자분들이 줄을 섰던 것 같다. 연변 이모님이 계시는 동안 내 입장에서는 신경 써 드린다고 나름 노력하였더니 우리 집을 떠나신 후에도 명절이나 생각이 나시면 가끔 전화를 하신다. 아이들이 크면서 아이들 할머니께서 오셔서 아이들을 돌보아 주셨기에 더 이상 이모님들을 고용할 일이 없어졌는데도 아쉬우신지 가끔 전화하셔서 울먹이시곤 하셨다. 물론 이러한 외국인 노동자분들 모두가 천사같이 순박하지는 않을 것이나 적어도 한국인 노동자와 같은 대우를 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얼마나 많은 우리의 아버님들께서 외국에 가셔서 일을 하시면서 외화를 본국으로 보내 우리를 키우셨는가? 그것을 기억하는 우리 세대들은 적어도 그분들을 기억하며 이 외국인 노동자분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살짜리 여자 아이였는데 성형외과 수술 스케줄이 잡혔다. 수술명이 상처 봉합이었다. 아마도 장난치다가 어딘가가 찢겨 봉합하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봉합할 부위가 자그마치 15 군데였고 원인은 개가 물어 생긴 상처라는 것이었다. 시골 할머니 댁에 놀러 갔는데 그 집에 있던 개가 손녀를 이렇게 물은 것이라고 했다.


 한 군데도 아니고 15군데나 물었으니 그 손녀 아이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가히 예상이 안 되었다. 생각했던 바와 같이 아이는 부모와 떨어지려 하지 않고 분리불안이 너무 심했다. 결국, 소녀의 아버님께서 마취 전까지 아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했다. 얼마나 여기저기를 물었던지.. 다행히 개가 광견병이나 기타 질환은 없었다고 했다. 지금쯤 소녀의 몸의 상처가 잘 아물어 희미해지고 마음의 상처도 희미해졌기를 기원해 본다.    


 우리 병원의 유방암 센터에서는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많이 하기도 하지만 요즘은 유방암 제거 후 변형된 유방의 모양을 재건 혹은 성형을 해주는 수술도 많이 한다. 과거에는 이 수술 시, 복부에 있는 조직을 유방 쪽으로 옮기는 수술을 많이 했었다. 지금은 일반 유방 성형처럼 보형물을 삽입하거나 등 쪽의 조직을 옮겨 성형하는 방법을 많이 쓴다. 어떤 경우는 수술받기 전 유방보다 더 이쁘게 성형되는 경우도 있었다. 나이가 들어 쳐지고 볼품없었던 가슴에 보형물을 넣어 빵빵하게 해 드리면 정말 유방암 수술을 받은 가슴이라고 보기 어렵다. 젊은 외과 선생님이 담당하고 있는데 정말 열성을 가지고 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다. 


 성형수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삶의 질을 높인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논문들이 있다. 특히 이렇게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의술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 분야의 보다 많은 발전이 있기를 그래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더 잘 치유되기를 기원한다.     


 과거 한 개그 프로그램의 코너 중 ‘쓰리랑 부부’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개그우먼인 김미화가 눈썹을 진하게 칠하고 나왔는데 그녀를 보면 연상되는 화가인 프리다 칼로는 어릴 때 교통사고로 온 몸이 부서져 나간 경험을 한 화가이다. 수많은 수술을 했으나 앉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누워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수많은 수술 중에 성형수술도 있었을 것이다.


 미적인 면보다는 기능의 회복을 위해 많은 수술을 받은 그녀에게 예술과 창작 활동이야말로 그녀의 정신과 육체를 성형해 준 도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가 살면서 겪었던 육체적 고통을 나타낸 ‘부서진 기둥’은 사고로 강철봉이 그녀의 척추와 골반을 관통하여 부서졌던 골격계를 보여주고 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예술은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음을 그녀는 외모만큼이나 강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제목: La Columna rota (부서진 기동, 프리다 칼로 작품, 1944)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화가로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에 18세에 교통사고로 인한 온몸의 골절로 평생을 수술과 통증으로 지낸 힘든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이다. 자신의 고통을 보정 코르셋을 착용하고 척추를 그리스 신화의 부서진 기둥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출처:Wiki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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