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에 열매가 달린다면 좋을까, 나쁠까.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야. 왜냐하면 모든 나무는 열매를 맺기 때문이지. 열매가 열리지 않는 나무가 진짜 있다고? 맞아, 수그루와 암그루로 나뉘어 있는 나무는 암그루에만 열매가 열리니 수그루는 열매 없는 나무인 게 당연해. 암수 구분이 없는 나무라면 꼭 열매를 맺는단다. 꽃이 피고, 잎을 내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고, 그 안에 귀한 씨앗을 담아 널리 퍼뜨리는 것은 식물의 본성이자 삶의 이유라고 할 수 있어. 아침저녁으로 날이 선선해지니 가을이 코 앞에 온 것 같아. 가을 하면 이런저런 열매들이 떠오르기 마련이지.
여기서 잠깐! 당연하지만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하나 알려 줄까? 열매들은 가을에 생겨나는 게 아니야. 봄이건 여름이건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게 돼. 처음에 열매는 꽃이 진 자리, 딱 그만큼의 크기야. 눈에 잘 띄지도 않지. 하지만 여름이 지나는 내내 햇볕의 기운을 잔뜩 받아 쑥쑥 커져. 여름이라는 말은 '열음'에서 유래되었다고 해. 열린다, 열다, 그래서 열림, 열음까지. 무엇이 열리느냐고? 바로 나무의 열매가 열리지! 주렁주렁 열매가 열리는 계절에 여름이라는 이름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제 크기만큼 알맞게 자란 열매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가을이 되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아. 밖으로 커지지 않고 안으로 여물어 간단다. 과일이 붉게 익고 달콤한 맛을 내도록 말이야. (사람이든, 어떤 동물이든) 그 열매를 보며 입맛을 다시게 될 즈음이면 씨앗은 세상 밖으로 나아갈 준비를 마치게 된 거야. 식물의 씨앗을 퍼뜨리는 짝꿍 동물(사람을 포함해서!)이 열매를 먹고 맛난 열매 안에 들어있는 씨앗을 이곳저곳에 퍼뜨리는 거니까 말이야. 가을이 되어 열매가 떨어지고 수확되고 씨앗이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면 나무도 일 년 살이도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지.
열매가 달리는 가로수 중에 오늘 이야기할 나무는 대왕참나무야. 지금도 대왕참나무에 도토리가 잔뜩 달려있더구나.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붉은색으로 변한 잎 사이사이에 흑갈색으로 오밀조밀 열려있는 도토리를 쉽게 찾을 수 있어. 그런데 도토리가 열리는 그 참나무가 진짜 가로수냐고? 나도 가로수로 서 있는 참나무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어. 깊은 숲 속에 가야만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들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거든. 도로가에 열리는 도토리라니! 은행나무도 가을이면 후드득 떨어질 정도로 풍성하게 열매를 맺지만 '도로가에 도토리라니!' 왠지 낯설게만 느껴졌었지.
대왕참나무가 가로수로 사랑받게 된 건 도토리 열매 때문은 아니야. 오히려 열매는 지나는 행인이나 차들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가로수로서 대왕참나무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 첫째, 대왕참나무는 공해에 무척 강한 나무야. 둘째, 병해충이 거의 없다고 해. 셋째, 가을에 물드는 단풍색이 정말 아름다워. 빨간색은 빨간색인데 커다란 잎이 불타듯 물들어가는 모습은 정말 멋지지. 내가 이제껏 만난 붉은 단풍 중에 가장 인상적인 빛깔을 보여준 것이 대왕참나무였어. 게다가 금세 자라고 큰 그늘도 만들어 준다니까. 대왕참나무는 가로수로서의 장점이 많은 덕분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로수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어.
보통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를 참나무, 상수리나무라고 해. 우리 숲에서 만날 수 있는 참나무는 여섯 종류가 있어.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잎, 도토리, 줄기의 특색이 조금씩 달라. 참나무 여섯 형제를 비교해 놓은 사진이나 그림은 쉽게 찾을 수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한번 살펴보길 바라. 도토리가 매달려있고 잎사귀도 많이 달린 요즘에 산에 가면 참나무를 구분하기가 좀 수월해. 얼핏 똑같이 보이던 나무들을 구분해 보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단다. 식물이라는 세계는 주의를 기울여 자세히 볼 때 우리를 더욱 놀라게 만들어.
대왕참나무는 아쉽게도 참나무 여섯 형제에는 속하지 않아. 원래 이 땅에 살던 나무가 아니라 외국에서 들여온 나무거든. 이 나무가 그런데 대왕이라고? 참나무들의 왕이라는 뜻인 걸까? 대왕참나무가 이 이름을 갖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참나무 중에 가장 커서 그렇다고 하기도 하고, 예전에 처음으로 이 나무를 수입하던 회사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하기도 하고, 나뭇잎의 결각(나뭇잎의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파여 들어간 모양)이 꼭 王자 같다는 얘기도 있단다.
대왕참나무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마라톤 선수였던 손기정 선수와 관련된 일화일 거야. 1936년, 때는 일제 강점기였지. 마라톤 경기에 조선의 손기정, 남승룡 선수가 출전했었어. 일제가 조선을 침략한 때였으니까 이 두 선수는 조선이 아니라 일장기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고 일본 선수로 올림픽에 참가해야 했지. 그 사실이 얼마나 슬프고 치욕스러웠을까. 두 선수는 경기 전날까지도 일본 국기가 표시된 공식 유니폼을 입지 않고 훈련에 임했었대. 드디어 경기 날이 되었지. 결과는 손기정 선수 금메달, 남승룡 선수 동메달이었어. 정말 대단하지? 더 뭉클하고 대단한 이야기는 메달 수여대 위에서 일어나. 두 선수는 일본 선수 자격으로 딴 메달이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았어. 조국을 잃은 설움과 슬픔이 더 복받쳤겠지. 두 선수는 메달리스트 답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부상으로 월계수 화분을 받은 금메달리스트 손 선수는 화분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말았지. 남승룡 선수 바지의 허리춤이 유난히 위로 올라가 있는 이유가 뭔 줄 아니? 혹시나 일장기를 가릴 수 있을까 하고 바지를 위로 끌어당겨 입었다는 거야.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해서 부러운 게 아니라, 가슴팍의 일장기를 가릴 수 있는 화분이 이다는 그게 그렇게 부러웠대.
선수들의 머리에 쓰인 승리의 상징 '월계관'을 만든 나무, 손기정 선수의 품에 있는 화분 속 나무가 바로 대왕참나무야. 손 선수는 저 화분을 모교인 양정고등학교에 기증하여 심었는데 그곳에 가면 '손기정월계관기념수'라고 되어있어. 처음에는 월계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대왕참나무였던 거지.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대왕참나무 대신에 손기정참나무라고 부르자고 주장하기도 해. 만일 나무의 이름을 손참나무로 바꿔 부른다면 나라를 빼앗긴 슬픈 역사와 끝까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애썼던 위대한 마음을 함께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참나무는 나무 중에서 으뜸인 나무, 진짜인 나무라는 뜻이야. 참나무 진액을 먹으며 살아가는 곤충들이 무진장 많아. 숲에 가서 혹시 곤충을 관찰하거나 채집하려면 다른 나무가 아닌 참나무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곤충들은 참나무의 달콤한 수액을 먹고살고 참나무 줄기 속에 알을 낳아 애벌레를 키우며 다음 세대를 도모하지. 참나무 열매 도토리는 누가 먹을까. 숲에 사는 동물 중에 도토리를 먹지 않는 동물을 찾는 게 더 어려울걸. 청설모, 다람쥐를 비롯해 어치, 꿩 같은 새들, 멧돼지까지 도토리를 아주 좋아해.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 도토리묵은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고구마나 감자처럼 쌀을 대신해 먹는 구황작물이기도 했어. 그뿐이 아니지. 캠프파이어를 할 때 제일 널리 쓰이는 나무가 참나무야. 그을음이 적고 오랫동안 잘 타서 땔감으로도 사랑받았지. 참나무로 가구를 만들면 아주 튼튼했어. 진짜 쓸모가 많네. 그래서 으뜸이라는, 진짜 중의 진짜라는 '참'이라는 글자가 붙었지.
오늘 만난 대왕참나무는 참나무 여섯 형제에 끼지는 못했지만 그 사연이나 아름다운 빛깔, 가로수로서의 미덕들 덕분에 한 번쯤 눈여겨볼만하단다. 어쨌든 진짜 진짜 좋다는, 그 참나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