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장마가 시작할 즈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었는데 장마가 끝나고 모든 것이 녹아내릴 듯한 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어.
지루하다는 단어에 무엇이든 붙일 수 있지만 '지루한 장마'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조합이 또 어디 있을까. 무엇이 그리 지루하냐고? 눅눅한 습기, 후드득 떨어지는 비에 젖어 질척이는 바짓단, 물에 젖은 신발과 양말, 잠깐 그치고 나면 '비 오듯' 쏟아지는 땀 같은 것들 말이야. 장마는 500여 년 전부터 사용되었던 순우리말이야. 여름철마다 1년에 오는 비의 거의 1/3이 쏟아지는 이 시기가 해마다 반복되고 있어. 그런데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기상청의 발표가 있기 전에도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공식적으로 장마가 끝나다고 한 후에도 비슷하게 또 쏟아지지. 몇 해전에는 50일 동안 비가 쏟아져 기록적인 장마라고 하더니, 이제는 물난리도 매년 기록을 경신하는 중이지. 몇 십 년 만에 난 최악의 장마나 물난리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매해 기록을 경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걱정도 되고 서글퍼지기도 해. 지구는, 지구에 사는 우리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양동이에 담긴 물을 쏟아붓듯이 떨어지는 빗줄기를 볼 때마다 걱정이 되는 건 나만은 아닐 거야.
이 장마 기간을 이겨내고 가을까지 쭉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어. 업신여기다, 능가하다 할 때의 능, 하늘 소, 꽃 화. 하늘을 능가한다는 뜻을 지닌 능소화가 바로 그 주인공이야. 왜 이 꽃을 보고 하늘을 능가한다, 업신여긴다 했을까. 능소화는 담쟁이덩굴처럼 담이나 전봇대를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가는 성질을 지닌 덩굴성 식물이야. 담쟁이에게는 빨판처럼 생긴 작은 발이 있거든. (정말 발 같이 보여!) 담쟁이는 이 빨판 발을 벽에 착착 붙여 몸을 고정시키고 위로 오르지.
능소화는 좀 달라. 줄기 사이에서 공중 뿌리를 내 거든. 공중 뿌리란 땅 속이 아니라 줄기 중간중간에 나오는 뿌리를 말해. 그 뿌리를 뻗어서 주변의 벽이나 물체에 몸을 강하게 고정시키며 위로 올라. 담쟁이와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면 능소화는 굵은 줄기를 만들어 굳세게 자라는 나무라는 점이야. 담쟁이도 단단한 나무로 자라기는 하지만 능소화의 줄기는 그에 비하면 훨씬 두껍고 강인해 보인단다. 벽이든 기둥이든 끝까지 오르고도 이 나무는 만족을 모르네, 계속 줄기를 뻗고 뻗어. 그럼 줄기가 밑으로 축 쳐지며 주홍빛 능소화 꽃가지들이 아래로 늘어지지. 전봇대나 담벼락 한 면을 모두 가릴 정도로 풍성하게 잎과 꽃을 내는 능소화 담벼락이 있는 곳은 사람들이 사진 찍기 좋아하는 명소가 되기도 해.
여기서 퀴즈를 내볼게. 능소화는 우리나라 자생종은 아니지만 아주 오랜 옛날부터 키워지던 나무거든. 그럼 이 나무가 양반집 마당에 주로 있었을까, 평민집 마당에 있었을까. 정답은 양반집 마당이야. 평민들이 이 꽃을 키웠다가는 벌을 받기도 했다지. 왜 양반들만 이 꽃을 심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모양새가 괘씸해서 평민들이 이를 닮으면 안 되니 양반만 심었다라거나, 기품 있는 모양을 양반들이 좋아하고 아껴서 양반만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말이야. 다른 나무들보다 늦게 싹이 나오는데 그 모습이 느긋한 양반을 닮았다나 뭐라나. 능소화가 양반집에만 살게 된 연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지.
나는 왠지 첫 번째 이야기에 끌렸어. 이 나무를 보니 자꾸자꾸 위로 올라가거든. 다소 힘이 없어 보이는 담쟁이 같은 녀석과는 다르게 줄기는 또 어찌나 힘이 센지. 한번 휘감고 올라간 줄기를 떼어내는 일도 쉽지 않아. 그렇게 자꾸자꾸 올라가더니 제일 꼭대기까지 올라서서는 더 오르려고 한단 말이지. 유교사회에서 신분질서는 아주 견고한 것이었어. 평민들이 세상을 바꿀 궁리를 할까 봐 글도 배우지 못했다지? 그런 사회에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나무는 왠지 불손해 보였을 것 같아. 평민 계급 이하의 사람들이 '우리도 저렇게 위로 한번 올라가 봅시다!'이런 생각을 품고 사회를 뒤엎을 궁리를 했을지도 모르잖아. 능소화가 강인하게 쭉쭉 뻗어 오르는 기세를 보며 양반들은 평민들이 그 모습을 보고 배울까 봐 걱정하지는 않았을까 상상해보고는 해.
능소화 꽃이 떨어진 모습을 본 적이 있니? 능소화는 시들거나 쪼그라들지 않고 생생하게 활짝 피어난 그대로 땅에 뚝 떨어져. 동백꽃처럼 말이야. 그래서 능소화가 있는 거리를 지나면 나도 모르게 나팔처럼 고운 꽃 한 송이를 땅에서 들어 올리곤 해. 곧 시들어버리기는 하지만 왠지 꽃송이를 두 손에 담을 때만큼은 이 아름다움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던 양반들이 이 꽃을 자신들과 동일시했더라면 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볼 적마다 만감이 교차했을 거야. 추하지 않게 고귀하게 물러나거나 혹은 높은 데까지 올랐다가 허망하게 곤두박질치는 모습이 떠올랐겠지. 둘 중 어느 것이 떠올랐든 능소화는 양반들이 좀 더 청렴하고 올곧게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을 거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능소화, 시들지 않고 기품 있게 꽃을 떨구는 능소화. 능소화를 보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거나 능소화를 닮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어. 능소화가 굳건히 고고하게 서서 꽃 피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딛고 오를 기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지. 거리에서 능소화를 만나거든 무엇에 기대어 서 있는지 살펴보렴. 담벼락, 대문 기둥, 전봇대, 집의 벽채, 쇠기둥, 바위 벽. 그 종류도 다양해. 능소화는 무엇을 타고 오를지 고민하지 않아, 가리지도 않지. 그저 자신의 몸을 의지할 존재가 있다면 공중뿌리를 과감히 뻗어 몸을 받쳐 들고는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거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능소화 한 그루를 받치고 서 있는 '무엇'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능소화는 '무엇'들이 없다면 존재하지 못할 거야. 높이 오를 수 없을 테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꽃'이라는 이름도 전혀 어울리지 않게 되겠지. 그러니 이제 능소화를 만나거든 그것이 어디에 기대어 살아가는지 한 번 살펴봐주렴. 너와 나, 우리는 또 무엇에 의지하고 있을까를 함께 생각해 보아도 좋겠어. 나의 하루, 지금 이 순간을 지켜주고 견디게 해주는 것들에 대하여 말이야. 그건 아주 사소할 수도, 생각보다 낡고 비루한 것일 수도 있단다.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우리를 받치고 있기에 우리가 좀 더 나아가도 되겠다고 안심한다는 사실일 거야. 그것들이 있어 오늘도 우리는 능소화처럼 한 뼘, 한 뼘 뻗어가는 중이지.
능소화에 대한 오래되고 얼토당토 않은 오해로 이야기를 맺을까 해. 한 동안 능소화에 대한 괴담이 떠돌았었어.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게 뭐냐 하면 글쎄, 능소화의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실명을 한다더라고! 그 이유인즉슨 꽃가루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생겨서 눈 속 깊이 파고 들어간다는 말이었어. 능소화에 대한 결국 괴담은 오해였다는 것이 밝혀졌어. 만일 여전히 오해가 팽배했다면 길가에, 담벼락에 사는 능소화는 잘려나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을 걸.
휴, 오해가 오해로 끝나 그 얼마나 다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