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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야 Aug 16. 2023

너의 백일은, 배롱나무

출처-크라우드픽

무서운 태양볕과 쏟아지는 빗물, 무거운 습기와 슬프고 답답한 뉴스들로부터 네가 무사하기를 빌어. 


네가  나무라면 어느 계절에 꽃을 피울 거니? 추운 계절을 지나고 오는 따뜻한 봄도 좋고, 무더위를 건너고 오는 선선한 가을도 좋겠지. 여름은 어떨까. 나쁘지는 않지만 폭염이 일상인 요즘 같은 세상이라면 여름을 선뜻 고르기는 어려울 것 같아. 폭염이 계속되면 가뭄이 되어 물이 부족할 것이고, 폭우나 태풍으로 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무사히 여름이라는 계절을 나기가 점점 어려워지지만 이런 시절에 예쁜 꽃을 볼 수 있어 나는 거기서 위로 한 줌을 얻는단다. 오늘은 더위가 한창일 때 알록달록 꽃을 피워 우리를 기운 나게 해주는 배롱나무 이야기를 할 거야. 


배롱이라는 이름은 백일홍이라는 말에서 온 거라고 해. 백일홍을 빨리 발음하면 '배롱'이라는 말과 닮게 되거든. 백일홍은 '일백백', '날 일', '붉을 홍자'를 써.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우리가 백일홍이라고 부르는 식물은 풀도 있고 나무도 있어. 둘 다 백일홍인데 구분하기 위해서 배롱나무는 목백일홍이라고도 부르지. 


출처-서울숲


배롱나무가 백일홍이 되고 배롱나무가 된 것은 그 꽃이 백일 동안 피어있기 때문이야. 배롱나무의 꽃은 얇은 꽃잎 여섯 장이 모여 있어. 멀리서 보아도 곱슬곱슬 끝부분이 말려 레이스 같은 느낌이 나는데 자세히 보면 정말 신기하게 생겼단다. 꽃잎 여섯 장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꽃잎이 한 장씩 떨어져 있는 것 같거든. 노란 빛깔 헛수술이 가운데 잔뜩 있고 진짜 기능을 하는 수술 여섯 개가 길게 뻗어 구부러져 있어. 그리고 가장 긴 암술이 하나 있지. 풍성한 레이스처럼 다닥다닥 모여 핀 꽃들이 참 예쁜데 자세히 한 송이를 살펴보니 신비롭기까지 하네. 


백일홍에 대한 오래되고 유명한 전설이 있어. 아마 한 번쯤 들어보았을 걸. 바닷가 마을에 나쁜 용이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가고 고깃배를 침몰시키곤 했어. 용의 포악함이 두려웠던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용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쳤어. 그 해 제물이 되기로 한 처녀에게 사랑하는 총각이 있었지. 그 총각은 자신이 용을 물리치겠노라고 선언하고 배를 몰아 바다로 떠나기로 했어. "내가 용을 물리치면 흰 깃발을 달고 올 것이고, 내가 죽으면 붉은 깃발을 달고 오겠소!" 용감한 청년은 용을 단칼에 무찔렀다지. 그런데 용의 피가 흰 깃발에 튀어버린 거야. 총각은 깃발이 붉게 물든 것을 까맣게 몰랐대. 먼 절벽에서 이제나저제나 배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처녀는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까? 드디어 멀리 뱃머리가 보이네. 이걸 어쩌지! 붉은 깃발이야. 처녀는 너무나 슬퍼 절벽에 몸을 던져버렸어. 영문도 모른 채 마을로 돌아온 청년은 처녀가 죽은 것을 알았고, 뒤늦게 깃발이 피로 물든 것을 알아채고는 통곡을 했어. 처녀가 총각을 간절히 기다리던 그 자리에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백일 동안 붉더래. 그게 백일홍이야. 


그런데 왜 백일일까. 처녀의 애타는 그리움이 오십일이거나 천일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여기서 백일은 무언가가 온전하게 변화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뜻하는 거야. 백일잔치를 떠올려 보자. 아기가 태어난 지 백일이 되면 무병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상을 차리고 축하를 하지. 옛날에는 먹고살기 힘들고 병에 쓰는 약도 없어서 아기가 태어나 백일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대. 백일을 넘겨도 살아남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래도 큰 고비는 넘기는 거야. 백일이 지나면 아이가 밤과 낮을 구분하는 생체리듬이 잡히고 젖도 잘 빨아먹으니 무럭무럭 제법 커지거든. 갓난아기를 키우며 힘들어하는 엄마, 아빠에게 '백일의 기적'이라는 말도 널리 쓰이더구나. 아이가 백일이 지나면 한 단계 성장한다는 뜻이겠지. 


백일의 시간이 지나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는 또 있어.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 이야기 알고 있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곰과 호랑이가 환인을 찾아가 물었더니, "쑥과 마늘만 먹으며 캄캄한 동굴에서 100일을 견뎌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했다지. 여기서도 왜 꼭 집어 100일을 버티라고 했을까? 백이라는 숫자는 온전함을 담고 있어. 단순히 99보다 1 큰 수라는 뜻보다 더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거지. 어떤 모임이나 관계에서 백일을 기념하기도 하고, 중요한 시험이 있을 때 D-100을 챙기기도 해. 이쯤 되면 100일을 지나 보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 아닌 것 같아. 끝내 버텨내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시간, 견디고 견디고 또 견디는 인내 그리고 완성의 시간이랄까. 


라디오를 듣다 보니 백일을 피는 배롱나무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공익 광고가 있더구나. 배롱나무가 정말 백일 동안 꽃을 피우냐고? 그럼! 여름 내내 피고 가을까지 피어나니까 백일 동안 꽃이 피어있지. 배롱나무는 한 송이 꽃이 백일을 견디는 것이 아니야. 줄기 아래쪽부터 꽃이 피고 지고 새로운 꽃이 피고 지며 백일 동안 꽃송이를 보여준단다. 공익 광고에서는 이런 모습에서 협력의 미덕을 찾아냈더구나. 누군가 힘들 때 다른 사람들이 대신 애써주기도 하며 그렇게 서로 돌보고 돕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말이야.  


배롱나무의 꽃송이들이 서로 다른 타인의 모임 아니라, 나 혼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어딘가에는 지쳐 떨어지는 꽃잎이, 한쪽에서는 새로 피어나는 꽃송이가 달려있는 그 모든 것이 나인 거야. 좀 시들어 떨어지면 어때. 지물쿠는 여름을, 어려운 시절을 당당히 건너고 있는 중인 걸. 나는 한 때 늘 잘하는 모습, 멋진 모습만 남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어땠냐고? 매사에 열심히 노력했고 좋은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그만큼 자주 지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지. 지쳤다는 걸 인정하는 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간다는 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야. 내내 꽃피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힘들게 한 것 같아. 찜통 같은 여름을 견디는 배롱나무도 시든 꽃을 떨구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말이지. 배롱나무 아래에는 시든 꽃이 여름 내내 가득해. 그만큼 꽃을 떨어뜨렸으니 새 꽃을 피울 수 있는 걸 거야. 


어린이들에게도, 어른이 된 이들에게도 견뎌야 할 100일이 무수하지. 지치면 조금 쉬어 가자. 여기 이 순간에 쉬어간다고 해서 내 존재가 한꺼번에 시드는 건 아니니까, 한 여름 배롱나무 꽃들처럼 말이야. 

모두의 남은 여름이 좀 더 환하고 보송보송하기를, 그리고 자주 쉬엄쉬엄 갈 수 있기를 기원할게.  


추신. 배롱나무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빼먹었네! 배롱나무는 겉껍질이 얇게 벗겨져서 매끈한 속살이 드러나. 나무가 어찌나 미끄러운지 원숭이가 올라타다가도 미끄러질 정도였대. 원숭이미끄럼나무라고도 하지. 나무껍질을 간질이면 꼭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줄기가 흔들려서 간지럼 나무라는 별명도 있어. 배롱나무를 만나거든 꼭 한번 간질여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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