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가자

우리는 왜 숲으로 왔을까

by 나날 곽진영
삶은 늘 선택이다


삶은 매번 선택의 연속이었다. 결혼 이후의 삶도 늘 선택의 연속이었다.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마다 우리는 계속 거주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했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가 좋아하는 풍경, 우리가 원하는 삶에 대한 고민을 했다.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공간을 계속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외로움을 동반했지만, 낯선 장소가 주는 두려움을 없애주기도 했다. 차곡차곡 우리는 경험치를 쌓았다. 도시에서 조금씩 멀어졌고, 편리함과 거리가 먼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늘 선택의 과정이라고 했지만, 우리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일은 항상 생각지도 못하게 흘러간다. 신기한 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결국 최선의 결과를 낸다는 것이다.


이제 진짜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일 때였다. 회사 때문이 아닌,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 아닌, 진짜 우리가 원하는 곳에 우리의 터전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임박했다. 계획에 없던 셋째로 인해 일정을 조금 앞당겨 이사할 곳을 알아보았다. 산에 사는 건 나의 계획에 없었는데, 결국 나는 산에 살게 되었다.


양평 앓이를 하면서 시작된 학교에 대한 고민을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일반 초등학교, 혁신 초등학교, 대안학교, 그리고 홈스쿨링의 선택지 중 나의 답안을 내놔야 했다. 그리고 공교육 안에서 작게나마 대안 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혁신 학교로 마음을 굳혔다. 그 선택의 이유는 내가 숲으로 온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너는 특별하지 않다.’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왜 내 아이가 특별하지 않다는 거냐며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나의 아이는 귀하고,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할 특별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의 위험이다.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이 성장하는 아이에게 얼마나 위험한 지 신랑과 나는 둘 다 경험했고, 그래서 경계했다. 내가 양평의 멋진 전원주택에서 주춤했던 이야기를 했었다. 시골에서 살아보는 것과 시골에서 사는 것은 다르다. 더 위험한 건 살아본 건데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잘 모르는데 아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그곳에서 나는 그런 위험을 느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에서만 행복하다. 우물 밖으로 나왔을 때 온몸으로 그 충격을 받아들여야 하는 개구리의 비극을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나는 아이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특별하지 않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삶을 살기를 바란다.


우리는 왜 숲으로 왔을까


우리는 왜 숲으로 왔을까. 처음엔 막연하게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 자연에서 뛰어놀게 하고 싶다, 사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다, 그런 이유였다. 거기에 전원주택에 대한 로망이 덧붙여지면서 그때부터 “자연 육아 앓이”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그랬다. 나도 그런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삶이 소용돌이치며 하수처리장 안에 딱 놓였을 때, 그리고 1년을 살아냈을 때(난 살아냈다고 표현하고 싶다.) 깨달았다.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의 아이가 어떻게 컸으면 좋겠는지.


나는 아이가 자연을 느끼며 크기를 바란다. 사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은 아이에게 그다음을 예측하고 기대하게 한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 어떤 꽃이 피는지 어떤 바람의 냄새가 나는지 어른은 모르지만 아이는 안다. 자연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텔레비전이 없어도, 놀이터가 아니어도 아이는 예쁜 돌멩이를 모으고, 들꽃을 꺾어 팔지를 만들며 놀 수 있다. 그런 삶에 좋은 집은 필수 조건이 아니다. 사실 집이 별로 일수록 아이는 밖에서 논다. 아이가 흙을 잔뜩 묻히고 들어와도 용인되는 곳이 엄마는 괴로울지라도 아이에게는 더 자유로운 곳이다. 그 당시 우리 가정 경제상황도 있었지만, 나는 꼭 좋은 집을 짓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았다. 아이가 자유롭고 안전하게 집을 드나들 수 있는 환경이면 충분했다.


학교에서 혁신 교육을 해도 학교에서 채워주지 않는 부분은 방과 후 학습을 해야 한다. 아이를 소신껏 키우고 싶어도 주위 환경이 그렇지 않으면 휘둘리게 된다.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다. 도시에서 나름의 소신을 갖고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않고 키우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문제없다. 그런데 내가 반대하는 사람들과 매번 논쟁을 하며 살 자신이 없었다. 유난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아이가 그런 환경에 계속 놓여서 왜 나만 배울 수 없느냐고 반문했을 때 부모의 교육철학을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좀 더 나은 방향을 함께 고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런 공동체에 속하고 싶었다. 용기가 없다고 말하는 편이 맞다. 나는 투사가 아니라 그저 행복을 향한 방향이 조금 다른 엄마일 뿐이니까.


세상에 정답은 없다


나는 아이가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자랐으면 좋겠다. 즐거운 인생을 살면 좋겠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지 못해도,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허드렛일도 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 나는 많이 놀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넘어진 사람이 그것을 찾을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시에서는 많이 놀 수도 많이 넘어질 수도 없다. 자유롭게 놀게 하기엔 위험요소가 많다. 그럼 아이는 쉽게 넘어질 수가 없다. 쉽게 넘어지고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을 배울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숲을 선택했다. 자유롭게 놀고 열심히 넘어지라고. 아이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 어른이 보기에 무의미하거나, 좋은 선택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무조건적으로 아이를 응원하는 엄마는 분명 아니어서, 그런 나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논리를 펼 수 있는 사람으로 크면 좋겠다. 나의 반대를 이기기 위해 열심히 싸울 수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비판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으로 크기를 바란다.

알고 있다. 내가 욕심이 크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으면서, 아이는 그러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그래도 나는 아이 안에 커다란 에너지가 생기면 좋겠다.


모든 부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를 키운다. 자기처럼 키우고 싶어서, 혹은 자기처럼 키우고 싶지 않아서. 나도 마찬가지다. 숲에서 아이를 놀게 하고 싶다는 내가 좋은 엄마는 아니다. 나 또한 내가 느낀 결핍을 아이에게 투영하고 있을 뿐이다. 내 경험을 전제로. 어쩌면 나의 아이들은 도시에서 공부하고 싶을 수 있고, 엄마의 선택에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지금은 숲으로 간다. 아직은 내가 아이들보다 힘이 있으니,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 뿐이다. 언젠가 이 곳이 싫다고, 이렇게 사는 것이 싫다고 하면 아쉽지만 그때 다시 인생의 방향을 수정할 수도 있겠지. 세상에 정답은 없다.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사람이라 신의 존재를 의심해 본 적은 없지만, 신은 신일뿐 내 삶에 큰 관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흘러간 시간들을 돌아보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숲으로 오는 과정은 생각보다 고단했다. 삶의 공간을 바꾸는 일이 이렇게까지 힘들 줄 알았다면 나는 이 과정을 또다시 걸을까. 그렇게 불가능해 보였던 일도 간절히 바랬더니 이루어진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우리는 숲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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