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이 게으른 사람입니다.
나는 말도 느리고 행동도 굼뜨다.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게을렀다. 학창 시절엔 선생님들의 배려 아닌 배려로 지각을 용인받았다. 그래서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다. 이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도 나를 간섭하지 않는 시간이 오자 나태와 게으름이 나를 덮쳤다. 대학 시절은 열등감과 게으름, 딱 두 단어로 정리가 된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만 가면 “완료”라고 생각했던, 세상이 만만했던 아이가 완전히 쭈그러들었다. 나는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였다. 내가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꾸만 뒤처지고 있었다. 따라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당황한 개구리는 말했다.
“난 느린 사람이야. 느려도 괜찮아. 모두가 같은 속도로 달릴 필요는 없어!”
마치 느리게 살기의 표본이라도 된 것처럼, 나만의 철학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세상 여유로운 사람처럼, 치열하게 사는 친구들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인생의 달리기에서 점점 뒤로 빠졌다. 그렇지만 나는 느린 것이 아니라, 돌아오지 않을 생생한 젊은 날을 낭비하고, 낭비하고, 낭비하고 있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몸을 뒤덮고 있는 나태를 씻어내지 못했다. 다가 올 미래가 두려우면서도 그저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게으름의 반대말, 느림
아이를 낳고 내 삶에 어떤 경고음이 울렸다.
'아이도 나처럼 게으르면 어쩌지? 삶의 수많은 기회를 기회인지도 모르고 놓쳐버리면 어쩌지?'
내가 아이에게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 지독한 게으름이었다. 느리단 핑계를 대며 게으르게 산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내가 게으른 삶을 살면서 느낀 불편이 무엇일까? 답부터 찾아야 했다. 게으른 사람은 느리게 살 수 없다. 사실 게으름의 반대말을 느림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 같다. 게으른 사람은 늘 조급하다. 시간에 늘 쫓겨 종종 거리며 재촉해야 한다. 그러는 사이 여러 사람에게 미안해하고, 눈치를 봐야 한다. 자신의 능력보다 늘 한, 두 단계 낮은 평가를 감수해야 한다.
느림이란 더 빠른 박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느림은 시간을 성급히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 시간에 쫓겨 허둥대며 살지 않겠다는 의지, 세상을 넉넉히 받아들이며 인생길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능력을 키워가겠다는 의지의 확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삐에르 상소는 그의 책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몸의 빈둥댐이 아닌 스스로 시간을 선택하고 천천히 움직이는 힘, 그것이 바로 느림이다.
산으로 온 후 6개월은 방황의 시간이었다. 이곳으로 오면 분명 다른 삶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우리의 삶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점점 회기하고 있었다. 공간의 변화가 주는 잠깐의 새로움은 곧 익숙해졌다. 익숙함은 게으름을 부르고, 도시에서와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간단한 편의시설조차 없는 불편함만 남았을 뿐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거기까지만 가면, 그곳으로만 가면, 내가 꿈꾸는 삶이 펼쳐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뭐지? 남편의 게으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녁이 있는 삶을 얻었다며 남은 시간에 뭘 할까 고민하던 사람은 이제 겨우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하면 저녁을 먹고 맥주 마시고 자고 있었다. 이게 뭐지? 왜, 왜 이렇게 됐지? 이곳까지 와서 똑같은 삶을 산다는 공포가 갑자기 밀려왔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이었다. 엄마의 늦잠으로 아이가 헐레벌떡 학교에 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전에 어린이집을 다닐 때는 항상 지각 등원을 했다. 내가 늦게 일어나니, 아이들도 늦게 일어났고, 그렇게 빈둥거리다 천천히 갔었다. 그런데 학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가 본인의 이유가 아닌 엄마 때문에 ‘지각하는 아이’가 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새벽을 깨우다
우리가 처음 이직을 했을 때 시도해 본 '새벽 기상'을 떠올렸다. 신랑은 이직을 했고, 우리의 주거 공간은 열악해졌고, 나는 새로운 인생을 선택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끌려 다니는 삶에서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경험했다. 그 자신감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할 수 있어, 너도. 한 번 해보자.”
“뭘?”
“이 게으름의 늪에서 빠져나가는 거야.”
아마 그때 나는 발악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하수처리장 안에서 살고 있지만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야. 봐봐, 나 이렇게 멋있게 사는 사람이야.”
그런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할 엘로드의 <미라클 모닝>을 만났다. 명상을 하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아침을 맞이하는 이 루틴을 시작했지만,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고, 명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두 번의 깨어남이 삶에 활력이 되고 있었다. 그 미라클 모닝은 셋째를 임신하면서 막을 내렸다. 사실 시작하자마자 막을 내린 것이다. (웃음) 다시, 새벽 기상을 하는 거야!
생각해보면 나는 아이를 핑계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위해 자연을 선택했고, 아이를 위해 미라클 모닝을 선택했고, 앞으로 많은 선택도 아이를 위해 할 테지만, 사실 난 나를 위한 선택을 계속하고 있었다.
시간에 쫓겨 허덕이며 30여 년을 버텨 온 이 여인은 어떻게 진정한 느리게 살기를 할 수 있었을까?
느리게 살기의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중요하고 제일 좋아하는 일을 새벽에 한다. 아이가 셋인 집은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간단히 운동을 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아무리 집이 지저분해도, 나만의 시간엔 그것들을 보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 집중한다. 이렇게 아침의 2-3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 뒤는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움직인다. 병든 닭처럼 졸던 낮 시간도 정상 궤도에 오른다.
시간 부자가 되었습니다.
나의 느리게 살기는 그런 거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에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내는 것, 그 외의 일에는 한 없이 빈둥대는 것. 나는 뭘 해도 열심히 하지만,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일은 명확하다.
이 모든 것이 숲이라서 가능한 일은 아니다. 공간이 주는 변화는 아주 잠깐이다.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가 더 중요하다. 우리가 숲으로 오면서 했던 많은 고민들과 생각들이 결국 변화를 만들었다. 그 최종 결과물이 숲일 뿐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넌 숲으로 가서 더 도시 여자처럼 살고 있다고. 맞다. 도시에 살 땐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소비를 위해 도시를 내려 가진 않지만, 배움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도시를 간다.
질질 끌려다니 던 시간이라는 놈에게 드디어 이제 내가 너의 주인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의 시간과는 다른 나의 시계추가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