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
내가 앞서 실험기를 쓴 이유는, ‘내가 이렇게 오답을 써도 잘 살았다’는 증거를 내세우려는 게 아니다. 다섯 번의 실험만 했을 리 없고, 그마저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는 아직 정답은커녕 모범답안조차 내놓지 못했다. 다만 수많은 가정과 시도 속에서 문제를 보완하는 법, 때로는 포기하는 법, 간혹 해답을 찾아내는 법을 조금은 배워왔다. 정답을 찾진 못했지만, 그 속에서 찾은 나만의 답 몇 개가 내 삶을 풍요롭게 했다.
우리는 실패보다 포기를 먼저 배운다.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인적 자원이 없어서. 이유는 끝도 없다. 그래서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 점 하나 찍어놓고 내가 그려야 할 그림의 크기에 압도돼 지레 포기한다. 애초에 재능이 없다고 단정하고 접어버린다. 애쓰고 끈질기게 버티는 수고를 하기 전에 물러난다. 포기에는 늘 그럴듯한 이유가 따른다. 나도 그랬다.
나는 오랫동안 그 책임을 부모에게 돌려왔다. 정답만 강요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 하고 싶은 걸 말조차 못 했다고. 그래서 성우의 꿈도, 악기 배우는 일도, 돈 걱정 없이 공부하는 일도, 유학도, 워크홀리데이도 다 접어야 했다고. IMF 시절,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고 부모님의 불화가 이어지던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몸을 사리고 숨죽이는 일뿐이었다고. 부모님이 들으면 통곡할 일이다. “내가 공부를 잘해서 문제였어. 차라리 못했으면 기대가 없어 자유롭게 살았을 텐데.” 별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내내 부모를 원망했지만, 세 아이의 부모가 된 지금은 안다. 그건 진실의 절반도 안 되는 이유였다. 사실 포기의 원인은 내 안에 있었다. 나는 애초에 해도 안 될 거라 지레 겁을 먹었고, 잘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걸 포기할 만큼 한 가지에 매달려야 했지만, 그만큼의 용기를 내지 못했다.
문제는 부모도, 환경도 아니었다. 내가 나를 몰랐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 바람이 내 안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타인이 정한 기준을 따라가는 것인지조차 아리송했다. 성우가 되고 싶었을 때, 내 목소리가 특이하다고 여겼던 건지 아니면 뭐라도 인정받고 싶었던 건지 알지 못했다. 유학을 꿈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낯선 곳에서의 모험이었는지, 아니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핑계였는지 따져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하고 싶다”는 말만 했을 뿐 그것이 나의 진짜 욕망인지, 두려움을 가린 환상인지 깊이 묻지 않았다. 그러니 실패는커녕 시도조차 경험하지 못했다.
결국 나에게 부족했던 건 용기가 아니라 자기 인식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니, 실패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실패가 무서운 게 아니라, 스스로를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보다 먼저 해야 하는 질문은 '나는 지금 진짜 무엇을 원하는가.', '그 욕망은 나의 것인가, 아니면 부모와 사회가 심어준 것인가.', '나는 무엇을 두려워해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가.'같은 것이다.
실패는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시도하지 않는 삶이 우리를 무너뜨린다.
실패란 결국 시도의 다른 이름이다.
중요한 건 오답이라도 시도해 보는 용기인 것.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질문은 지금도 내게 유효하다. 정답의 길에서 벗어나면서, 나는 내 안의 두려움과 욕망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것을 아는 만큼, 다음 실패를 맞이할 용기도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