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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오백 미터 아래에서 끌어올려진

by 소란

기차를 타고 여섯 시간을 달려 찾아간 산간벽지에서 나의 부모는 리조트 건설 현장 인부들을 상대로 밥을 해주고 있었다. 일명 함바집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엄마는 인부들의 삼시 세끼와 두 번의 새참을 차려냈고, 아버지는 엄마가 만든 음식을 배달하고 주방 보조 일을 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을 때는 집안의 거의 모든 것을 아버지가 주관하고 엄마는 보조자로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어려워했는데, 채 일 년도 안 된 사이에 전세는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자존심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아버지는 툭하면 화를 냈다. 엄마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육탄전에 창고 같은 식당 안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반찬 그릇이 날아다녔다.

기차역에 마중 나온 엄마는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엄마는 나를 보고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울에서 햄버거만 먹다가 왔니?”

기차역 앞 식당에서 내가 김치찌개를 한 숟가락 떴을 때 엄마가 겨우 뱉은 말이었다. 일 년 가까이 연락이 끊겼다가 비정상적으로 살이 쪄서 돌아온, 초라한 행색의 셋째 딸에 대한 원망과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이후로 나는 식당 구석에서 매일 산처럼 쌓여있는 그릇을 마땅히 주어진 형벌처럼 씻어댔다. 나의 죄목은 구제 불능이었다. 당시 나는 다시 한번 나를 받아준 부모와 식당 옆에 붙어있는 손바닥만 한 방구석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 인생이 그렇게 정리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나의 부모처럼 어딘가에 처박혀서 아무렇게나 살 수도 있겠구나. 나는 더는 나를 믿지 않았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욕구불만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엄마가 해준 밥을 얻어먹으며 내가 다시 사람 꼴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쯤에 나와 함께 다단계 회사에 있던 영선 언니가 찾아왔다. 영선 언니는 나와 같이 지하철 노선 끝자락 숙소에서 함께 지내던 사이였다. 그곳에서 무려 2년을 버틴 영선 언니는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곧바로 나를 떠올렸다고 했다. 연락처는 아마도 나연에게서 얻은 것 같았다. 그곳을 나와서도 나는 나연과는 꾸준히 연락하고 있었다. 나연은 그곳 생활이 힘들다면서도 여전히 그만둘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영선 언니도 차마 고향에 돌아갈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혈혈단신, 나보다 더 딱한 처지인 영선 언니는 숙식이 가능한 골목 귀퉁이 노래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남아돌았던 나는 밤마다 그 노래방을 찾았다. 우리는 허구헌날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노래를 불렀고 그러고도 심심하면 화투를 쳤다. 낮에는 설거지, 밤에는 술, 담배, 노래, 화투. 나는 탈출을 포기한 어항 속 금붕어처럼 그곳에서 숨만 쉬며 지냈다.

아무도 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사는 삶. 그건 나의 부모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나를 돌볼 의무와 책임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어항 속 물고기와 같은 생활도 적응이 되니까 또 그런대로 살아졌다. 언제까지고 그런 생활이 유지되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영선 언니가 벌써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노래방 사장과 사귀기 시작하면서, 그들 사이에 끼어 동해 어디쯤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 그곳은 내가 나고 자란 서쪽 바다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새하얀 물보라가 하염없이 이는,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바다, 그 위에 별처럼 초롱초롱 떠 있는 횟집들. 그곳에서 소주와 오징어회를 얻어먹으며 나는 처음으로 그곳에 정착하는 꿈을 꾸었다.

영선 언니와 함께 조그만 가게를 하나 맡아서 음식과 술을 팔고, 착한 뱃사람을 만나 사랑도 하고, 그 사람이 잡아다 주는 물살이로 요리도 하고, 배운 것 없고 가진 것이 없지만 나만을 위해주는 그 사람을 위해 나는 알뜰하고 소박한 꿈을 꿀 것이다. 쓸쓸하지만 꽤 괜찮은 미래 같았다. 나는 이후로도 삶이 팍팍하다 싶을 때면 자주 그 바닷가를 떠올렸다. 그곳에는 언제까지고 뭘 시작해 보기도 전에 섣불리 주저앉은 볼이 통통한 스무 살의 내가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천부적으로 주저앉는 성격이 아니었다. 애써 묻어두려고 했던 어린 시절의 꿈 비스름한 것들이 지하 오백 미터 우물에서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내게 묻기 시작했다. 이대로 정말 나는 괜찮은가, 이대로 주저앉기에 나는 아까운가. 결정적으로는 도서관에서 만난 이미란 작가의 그 책 때문이었다.

산간벽지에도 도서관은 있었고, 나는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느 날 또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다시 도서관의 쓸모라니. 새삼 가방 하나 덜렁 메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영혼들을 눈여겨볼 일이다.

그날은 눈발이 사납게 날리는 유난히 추운 날이었고, 그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춥다는 도시였다. 나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걸칠 외투 하나가 제대로 없었지만, 어차피 그곳은 나의 고향이 아니었고, 나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겉치레라는 건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만 가닿는 허영이었다. 거지꼴을 하고 낯선 도서관에 들어선 나는 책 사이를 방황하다가 운명적으로 그 책을 만났다.

나는 무아지경으로 책에 몰입했다. 깡촌 출신의,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졌던 작가는, 일찍이 ‘생’이 ‘독한 상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았고, 자칫 방심하다가는 스스로를 ‘쇠스랑’으로 찍어버릴 수도 있겠다고 아프게 자각했다. 그녀는 내게 남들보다 겨우 2년이 늦었을 뿐이라고,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중요하다고, 나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녀를 진창에서 구한 ‘가슴속의 순결한 한 가지’, 나도 그것을 가져야 했다.

나는 끝내 대학을 포기하지 못했다. 내 삶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남들이 다 가는 대학에 꼭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그해 수능 시험이 치러진 지 한 달도 더 지난 시점이었고, 부모에게 다시 대학 얘기를 꺼낸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모 역시 더는 나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나를 불쌍한 듯 쳐다봤고, 내가 경계에 서 있다는 걸 알았는지 입 밖으로는 절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럴 에너지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돈이 없었다. 매일 같이 서로에게 으르렁대며 손에 물 마를 날 없이 일했지만, 그들의 삶이야말로 단 일보도 진전할 기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을 조용히 알아봤다. 달리 뭘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나는 인터넷 한 귀퉁이에서 과거 수능 점수로도 갈 수 있는 대학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야말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여러 대학의 이름 중에는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그곳, 태평대학이 있었다. 등록금이 싸고, 커트라인이 낮고, 고향에서 가까운 곳. 가난한 동네에서 사촌 오빠들이 주르륵 들어가던 대학. 나는 운명처럼 태평대학에 다니게 될 것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일은 그렇게 되기로 한 것처럼. 나는 아무도 몰래 태평대에 원서를 냈다. 합격한 후에 부모를 설득해도 늦지 않을 거였다.

미달, 내가 지원한 학과의 경쟁률은 미달이었다. 나는 여전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희미한 것에 미래를 건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격”이라는 음성사서함을 듣는 순간, 나는 아주 오랜만에 세상으로부터 환대를 받은 기분이 되어 조금 울컥하기까지 했다. 진즉에 눈을 낮췄더라면, 그랬더라면 내 인생은 다소 시시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내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모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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