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향 나는 보고서

잘 썼지만 이상하게 닿지 않는 글의 정체

by 한끗작가


요즘 팀원들에게 보고서를 받으면, 묘하게 비슷한 기시감이 든다.

문장은 매끈하고, 수치도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틀린 말은 없다. 오히려 너무 정확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공허하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그런 글을 두고 ‘AI 향이 짙다’고 말한다.




나는 평소 팀원들에게 AI 도구, 특히 ChatGPT 같은 생성형 AI를 적극적으로 쓰라고 말한다.

나도 쓴다. 기획서 초안, 공지문, 보고서의 구조를 잡을 때면 종종 물어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AI가 만들어낸 문장은 ‘정확’할 수 있어도, ‘설계’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을.




AI의 가장 큰 장점은 정보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청한 모든 내용을 빠짐없이 정리해 준다.

제목도 달고, 도입도 만들고, 마무리도 깔끔하게 해 준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정보는 충분한데, 의도가 없다.

보고서를 쓰는 이유, 말하는 타이밍, 감정의 흐름이 모두 평면적이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래서 이걸 왜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사람은 ‘정확한 말’보다

‘내게 닿는 말’을 기억한다.


그 닿음에는 순서가 있고, 리듬이 있고, 여백이 있다.

그리고 그건 지금의 AI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AI는 내가 말한 걸 정리하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설계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AI의 초안을 문제 삼지 않는 이유는,

그 글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보도 정확하고, 문장도 매끈하다.

그래서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리고 거기서 멈춘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다.

초안은 그럴듯해도, 누구를 움직이기 위한 말인지,

지금 이 타이밍에 왜 이 말을 꺼내는지,

그걸 본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하고 싶은지는 빠져 있다.


말은 그저 맞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닿아야 한다. 움직이게 해야 한다.

그걸 설계하는 것이 아직, 사람의 영역이다.




실제로 나는 요즘 이런 스타일의 보고서를 자주 받는다.

“지속가능한 조직 성장을 위해 소통과 몰입을 기반으로 한 문화적 전환이 필요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말은 맞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읽고

정작 내가, 그리고 우리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보도 있고, 그럴듯한 단어도 많은데 정작 설계는 없다.

이게 바로 AI향이 짙은 글의 특징이다.


물론, AI에게 설계까지 하라고 지시할 수도 있다.


“임원 회의용이야.”

“처음엔 결론부터, 그다음 이유 정리해 줘.”

“중간에 질문 떠오르지 않게, 흐름 끊기지 않게.”

“마지막은 자연스럽게 액션이 그려지게 마무리해 줘.”

“이 문장이 왜 필요한지도 설명해 줘.”


지시를 잘하면, 사람 같은 글은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글을 보면,

‘이 말은 너무 두드러져’, ‘여기선 톤을 낮춰야 해’, ‘이건 빼야겠다’ 같은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결국 다시 손이 간다. 순서도, 강약도, 문장 간의 온도도.

AI가 만든 설계조차 ‘내가 원하는 설계’로 다시 고쳐야 한다.


그때 느낀다.

결국, 설계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결정하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그 결정은 지금도 여전히, 사람의 감각에 기대고 있다.




이 연재는 그래서 시작됐다.

초안 위에 흐름을 얹고,

정확한 문장 위에 설득의 구조를 짜는 일.


그건 아직,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그 설계의 감각을 나는 ‘한 끗’이라고 부른다.




다음 화에서는 "한 끗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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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