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이야기, 다른 주인공
무협지와 판타지를 읽는다.
초등학생 때 퇴마록을 처음 접한 이후,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취향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제는 종이책 대신 웹소설을 읽고,
서점 대신 플랫폼을 뒤지지만
결국 나는 여전히
비슷한 이야기 안에서
비슷한 감정을 기다린다.
고난, 수련, 각성, 복수, 성취.
이야기의 틀은 뻔하다.
주인공 이름만 다를 뿐
서사는 늘 비슷하게 흘러간다.
그런데도 나는,
새로운 작품을 계속 찾아다닌다.
왜 그런 걸까.
무협이든, 판타지든, 정통 로맨스든
이야기는 뻔한데, 그 뻔함이 좋다.
“여기서 곧 배신당하겠지.”
“이제 각성하겠구나.”
“이 장면은 울컥하겠네.”
예상대로 흘러가지만,
나는 그 감정을 기다리고,
예상한 만큼 느끼고,
그걸로 충분히 안도한다.
현실에서는 감정이 늘 엇박자다.
말하고 싶은 순간은 지나가고,
울컥한 마음은 삼켜지고,
그 감정은 늘 너무 늦게 온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내가 감정의 타이밍을 잡는다.
그게 위로가 된다.
내 마음이 내 마음 같다는
드문 감각이 거기엔 있다.
현실은 우연하고 불공평하다.
아무리 성실해도 결과는 엉뚱한 데서 오고,
사람 좋은 이가 손해를 보고,
열심히 산 사람이 더 지친다.
그런데 이야기 안에서는 다르다.
배신당한 자는 성장하고,
고통을 견딘 자는 각성하며,
끝내 악인은 응징된다.
이야기 안에서는
고통에 의미가 있고,
수련은 보상을 낳고,
정의는 돌아온다.
현실에서 끝내 도착하지 못한 감정들을
나는 이야기 속에서 대리로 정리한다.
그건 허구지만,
그 허구가 있어야
내 마음도 현실을 견딜 수 있다.
현실에서는 감정을 표현할 타이밍을 자주 놓친다.
한마디 꺼내기도 전에 상황이 지나가고,
몇 번 참는 사이에
그 감정 자체가 무뎌진다.
하지만 익숙한 이야기 안에서는 다르다.
결말을 알고 있어도,
전개를 다 외워도,
그 안에서는 감정이 다시 반응한다.
울컥해도 민망하지 않고,
눈물이 나도 허락되는 공간.
그 안에서는
나조차 잊고 지낸 내 마음을
조금씩 다시 느끼게 된다.
감정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복원하는 구조.
그게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다.
나에게 무협과 판타지는 감정의 피난처다.
뻔한 이야기지만,
그 익숙함 안에서 나는 다시 울고,
다시 안도하고,
다시 하루를 살아낸다.
예측 가능한 구조,
예상 가능한 감정선,
같은 이야기, 다른 주인공.
내가 아직까지 무협지를 놓지 못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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