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라는 말은 어느 나라 말이든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좋아라는 말을 좋아한다. 가슴이 몽글몽글하고, 이 사람이, 이 순간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내가 느끼는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질 때 희미하게 나오는 좋아만큼 달콤한 말이 없다. 누군가는 좋아해라는 말을 뻔하고 식상한 고백이라고 여기지만 좋아해라는 말만큼 우리가 솔직해질 수도 없을 거다.
어제는 수료식이었다. 마지막 부활동 시간과 겹쳐서 갈까 말까를 수십 번은 더 고민했던 날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엄중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행사라 빠졌으면 큰일 날 뻔했다. 수료증을 받고 37명의 유학생이 각자의 소감을 말하는 동안에도 별 감상은 없었다. 친구들이 스피치를 하고, 우리들의 수료를 축하한다는 말을 할 때도 그랬다. 내 마음은 이미 테니스부로 향해있었기 때문에 허례허식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하며 부루퉁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헤어지고 마는 유학생친구들이 있었기에 수료식이 끝나고 애들과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여태 고맙다는 말로만 마무리하기엔 아쉬워서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도 덧붙였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테니스부로 향했다.
테니스부는 오늘도 열심히 활동 중이었는데 끝마치기 직전에 온 거라 테니스 채도 들고 오지 않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해서 처음으로 코트 밖에서 구경만 했다. 친구와 떠들면서 테니스부를 완전한 이방인의 시점으로 바라볼 수 있었는데 거기에서 오는 감회가 꽤나 남달랐다. 벌써부터 우리들의 인생이 다른 궤도를 향하는 기분이었다.
그중 정말 더 친해지고 싶었던 리오 상에게, 8월에 시간이 되면 같이 밥을 먹고 싶다고 했지만 8월에는 미국에 간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미 늦었다는 말. 그게 얼마나 아쉬웠는지 코트에서 방방 뛰고 말았다. 기회가 있다면 더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이제 와 기회를 만들어보기엔 너무 늦었으니까. 이별이라는 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부실에 돌아가서는 애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마지막이라는 기분이 가득했으니까. 친구가 아무 말 없이 애들을 쳐다보길래 친구에게 시선이 향했다. 이 풍경을 담아두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아, 하고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렇지. 우린 이제 끝이지. 작년 11월부터 내 마음 한편에 존재했던 이 풍경은 이제 내 기억 속에만 남을 텐데.
테니스부 애들이 친구와 나의 사진을 찍어준다고 해서 수료증을 꺼냈는데, 그걸 본 애들이 모두 놀라워해준 덕에 열심히 자랑을 했다. 그리고 치사키 상이 말했다. 수료를 축하한다고. 수고했다면서 박수를 치자 다른 애들도 축하한다면서 박수를 쳤다. 이상하게도 그때 울컥했다. 아까는 그 말을 열 번 들어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이곳에 남겨질 사람들과 하는 작별인사는 너무나 잔인했다.
밖으로 나오자 굉장히 슬픈 노래가 울려 퍼졌다. 학교에서 1학기의 마지막날을 기념해 작은 여름 축제를 했고 행사 중 하나로 야외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깜깜한 밤, 후덥지근함이 살짝 배여 나오는 바람, 군데군데 켜져 있는 형형색색의 조명, 건물을 가득 비추는 영화까지. 평소와 다른 학교의 풍경은 우리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감상에 젖어있을 때쯤 영화에서는 거짓말처럼 졸업식 화면이 나타났는데 그때는 정말 꿈인 줄 알았다. 어떻게 타이밍이 이럴 수 있냐고 생각하면서 친구와 한참을 서있었다.
친구와는 남은 일정도 정리하고 밥도 먹을 겸 패밀리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곳에 앉아서 메뉴판을 마구 뒤적거리고 있을 때쯤 휴대폰에 알림이 왔다. 미국으로 떠나서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 된 리오 상이 었다. 한류를 좋아하는 대다수의 테니스부 친구들과 다르게 유일하게 일본 드라마나 음악을 좋아하던 리오 상. 나와 같이 야구를 좋아하고, 순정만화를 좋아하고, 드라마를 좋아해서 외국인이 아닌 나로서 대화할 수 있던 친구였다.
줄 게 있었는데 깜빡했다며 다음에 받아달라던 리오 상은, 나에게 정말 좋아해요,라는 말을 남겼다. 일본친구들은 대부분 그렇게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 아니라서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정말 좋아해요, 라니. 이 말은 만화에서도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몇 번이나 들었지만 실제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결국 그 메시지에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좋아한다는 말은 왜 그렇게 다정한 걸까. 단어 하나에 그렇게 많은 마음을 담을 수 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특별한 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슬픈 이별의 말이었다. 하루종일 내뱉었던,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언젠가 다시 만나요,라는 말보다도 더.
사실 매번 걱정했다. 챙겨줘야 하는 나를 귀찮아하는 건 아닐까, 가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기만 한 건 아닐까. 내가 같이 밥을 먹자고 연락해도 되는 걸까, 같이 놀자고 해도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연락 한 번을 못했다. 솔직할 수 없는 환경을 알아서 나도 솔직해지지 못했는데. 이 친구는 나보다도 훨씬 용기 있었다.
나도 정말 좋아한다고,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나한테 말을 걸어주고 웃어줄 때 항상 고마웠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언제나 나한테 장난스럽게 웃어주고, 내 말을 경청하면서 나와 대화하려고 노력해 주던 리오 상. 리오 상이 있어서, 테니스부 애들이 나한테 따뜻하게 대해줘서 내가 이 나라에 더 정을 붙일 수 있었다고, 일본에는 다정한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맑게 웃는 얼굴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 마음을 눌러 담아서 정말 좋아한다고, 답장을 했다.
누군가 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때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느껴진다. 내가 느낀 벅차오름과 감동과 애정과 온기를 전달하고 싶은데 나도 너무너무 좋아한다는 말밖에 오지 않는다.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을 때 가끔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난,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걸 멈추고 싶지 않다.
감정은 말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전해지지도 않고, 드라이아이스처럼 증발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좋아한다는 말만은 그렇게 느낄 때마다 쉬지 않고 전하려 한다. 내가 받은 온기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고 싶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지금 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라고. 리오 상에게서 받은 용기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에게도 좋아한다고 전했다. 이렇게 솔직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제 남은 기간은 3주 남짓. 남은 기간 동안 좋아해를 아끼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가진 좋아해를 모두 털어놓고 모두 전해서,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리고 싶다. 나는 생각보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 그 사랑을 다 전하고 싶다. 좋아해. 나중에는 이 감정도 옅어지겠지만, 과거형이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너무너무 좋아해. 그걸 기억해 줘. 알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