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끌치유 Oct 19. 2023

이렇게 살면 암에 걸립니다.

어느 암 환자의 조언

1차 항암 약물 투여 후 2주 정도가 지나니 점점 약 기운이 떨어지면서 다시 입맛이 돌고 체력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항암 주사를 맞자마자 사흘 동안은 부작용 억제제 효과로 인해 속이 약간 불편한 것 빼고는 부작용이 심하지 않았고, 5일째 되는 날부터 약간의 구토와 구내염 등 상피세포의 손상이 느껴졌다.


구토가 올라오고 체력이 떨어져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들면 집중해서 심호흡을 했다. 단전까지 공기를 들이마시고 뱉어내는 복식 호흡을 하는 것만으로도 올라오는 구토를 가라앉힐 수 있었고, 약에 취해 몸이 괴로울 때에도 호흡에 집중을 하면 몸이 이완되면서 편안해졌다.


출산 전에도 호흡하는 연습을 해 두었다가 산통이 올라올 때마다 심호흡으로 몸을 다스렸던 기억이 있다.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찾아오다가도 호흡에 집중하면 이내 통증이 완화되곤 했었다. 그런데 항암 중에도 구토가 올라오거나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심호흡을 하면 이내 통증이 사그라들었다.


부작용 억제제는 의사가 삼일 분만 지어주었는데, 약을 다 먹고 나면 심리적으로 불안해져서 그런지 괜히 속이 더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이겨낼 수 있어.’

‘애도 낳았는데 이 정도쯤이야.’

‘약간 울렁거리는 것뿐이야.’


라고 읊조리며 심호흡을 했다.


독한 항암 약에 몸이 대응하느라 기력이 빠지고 입 맛이 없어져서 식사량이 줄어든 것을 제외하고는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힘들 때마다 따로 약이 없어서 깊은 심호흡을 했는데 세상 어떤 약보다 효과가 있었다.


항암이 너무 힘들고 괴롭다는 이야기를 사전에 많이 들어둬서 그런 건지, 내가 젊어서 그런 건지, 이제 1차 항암이라서 그런 건지, 아무튼 최악의 상황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놓았더니 내가 생각했던 최악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1차 항암 시기를 보냈다.


남들은 1차 항암 때부터 고열에 시달리거나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나의 항암 1 차시기는 어려운 상황 없이 지나갔다.


살아보니 인생의 모든 일이 그랬다. 최악의 경우를 예측하고 리스크 관리를 해 놓으면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경우보다 최악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설령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보다 극한으로 안 좋은 상황이 발생해도 이 마법 같은 말 한마디로 버텨낼 수 있었다.


“죽기 밖에 더 하겠어?!”


역으로 말하면 절대 죽을 만큼의 최악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죽음이 코 앞에 가까워지니 죽기밖에 더 하겠냐는 농담조의 말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닌 말이 되어 버렸지만, 다 살자고 항암치료도 받고 하는 것인데 항암 치료가 힘들어 봤자 나를 죽이기야 하겠냐는 각오로 첫 항암 약물을 투여받았더니, 생각보다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나는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부터 치료하고 회복하는 동안 그간 하고 싶었지만 바빠서 하지 못 했던 것들을 실컷 해 보기로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또 뒤돌아보니 내가 뭘 그렇게 못 하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나는 이 세상이 주는 축복을 많이 누렸고 또 즐겼다.


전직 외항사 승무원이라는 직업으로 아프리카 포함, 남들은 평생 가 볼 수 조차 없는 세상 구석 구석을 다녀왔고, 외국인들과 함께 일하는 근무 환경 덕분에 세상 모든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남자도 국적별로 만나 보고, 연애도 실컷 해본 게 살면서 가장 잘 한 일 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는 곳마다 먹고 싶은 음식들을 마음껏 먹으러 다녔고, 독서 광인 나는 읽고 싶은 책도 실컷 읽었다. 김미경 같은 강사가 되고 싶어서 결국 강사가 되었고, 대학에서 교수가 되고 싶어서 교수도 되어 보았다. 결혼이 하고 싶어서 결혼도 해 봤고, 아이도 낳고 싶어서 낳고, 키웠다. 이혼은 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신뢰할 수 없는 배우자와 사는 건 병을 키우는 시발점이 되었으므로 그 또한 후회는 없다.


40년 동안 이렇게 많은 경험을 해도 되냐고 반문할 정도로 속된 말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죽음’이란 단어가 두렵지 않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비행기 사고로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고, 외국에 다니다가 예측하지 못 한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매일매일의 삶에 충실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날이 그 사람과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최선을 다해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했다. 그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나의 에너지를 퍼 주고 다니느라 정작 나 자신을 위한 에너지는 아껴두지를 않았던 것이다.


나는 암 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그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병에 안 걸리는 것도 이상하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부정하거나 분노하는 과정 없이 수용의 단계로 바로 들어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늘 최선을 다해 내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100 이상씩 썼다. 사람이 갖고 있는 에너지가 100이라고 치면 50만큼 써야 하는 날도 있고, 100만큼 써야 하는 날도 있고, 가끔은 2,30만 쓰기도 해야 되는데, 나는 내가 가진 에너지의 최대치인 100을 거의 매일 쓰면서 살았다.


아이를 낳고는 책임져야 할 생명이 하나 더 늘었기에 내가 가진 에너지의 최대량을 훌쩍 뛰어넘는 과부하 상태로 아이의 인생을 보살폈고, 나의 인생도 함께 성장시키느라 자야 할 시간에 자지 못하고 쉬어야 할 시간에 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식습관도 나빠지게 되었고, 끼니를 거르고 초콜릿이나 빵 같은 당분에서 순간 에너지를 얻거나 저녁이 되면 보상 심리로 폭식을 했던 일상이 이십 년 넘게 지속되었다. 에너지 부화가 걸려 방전이 되었는데도 무리해서 발전기를 돌렸던 것이다.


몸이 힘들면 병이 나는 것은 우주의 당연한 섭리이니 암에 걸린 것이 놀랄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치료를 받는 동안은 그냥 누워서 뒹굴뒹굴 쉬기로 했다.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어차피 에너지 레벨은 50 정도로 낮아질 테니 나는 늘 2,30 정도의 에너지만 사용하면서 지내야만 힘든 항암에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 간 몸이 힘들어서 이상 세포가 번식하게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절대적으로 나의 모든 에너지를 치유에만 사용하도록 집중시켜야 했다.


침대에 누워서 잠도 실컷 자보고, 소파에 누워서 네플릭스 영화랑 드라마도 실컷 보려고 했으나 몸에 베인 독서가 매일 하던 일이라 그냥 책을 읽었다.


마침 미국에서 한 참 베스트셀러가 되어 인기 있었던 [파친코]가 한국에도 출간되어, 서울 병원에 갔을 때 서점에서 1권을 사 온 것을 항암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부터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구토가 올라오고 입 안이 헐고, 머리가 빠지는 시기였는데, 책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잠을 자야 하는 시간임에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몸이 힘들어 식은땀이 나는데도 책을 부여잡고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아픈 줄도 잊어버렸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항암약물 1회 차 투병기간을 2주 정도 보내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은 회복기로 접어들어 입맛도 다시 돌게 되었고 컨디션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일주일 후면 다시 2차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남은 1주일의 시간은 다시 항암 치료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체력을 보강해야 했다.


우선은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잘 먹어야 했는데 2주간 항암으로 쇠약해진 몸을 위해 입맛이 돌 때는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었다. 가만히 있으면 떠오르는 음식들이 있곤 했는데 우리 몸은 태초부터 자연스럽게 치유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곧 내 몸에서 필요한 영양소일 경우가 많기에 떠오르는 음식들이 있으면 미루지 않고 바로바로 어머니께 요리해 달라고 하거나 건강, 보양식 위주의 외식도 가끔 했다.


단,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국물요리, 소화가 잘 안 되는 면요리, 기름이 많은 고기나 숯불구이, 튀김요리는 무조건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


술 마신 다음 날이면 달려가서 먹곤 했던 조미료 탕 해장국, 귀찮으면 손쉽게 끓여 먹던 라면, 파스타, 숯불에 구워 먹던 마블링 넘실거리는 꽃등심, 기름 범벅 프라이드치킨과 탕수육 모두 거의 순서만 바꿔가며 매일 먹다시피 하던 음식인데 알고 보니 이 음식들은 모두 암세포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조미료, 설탕, 지방은 몸속 염증을 가중시키는 원료 들인데 내가 먹던 음식은 모두 조미료와 설탕, 지방이 가득한 음식들이었다. 내 몸속에는 항상 염증이 가득했던 것이다. 몸속 염증은 우리 몸을 산화시키고, 산화된 부산물들이 몸속에 쌓이고 해독을 못 하게 되면 여러 가지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인데 그래서 내 몸은 항상 피곤했던 것이고 면역도 떨어졌던 것이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는 이런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암에 대해 공부하고 내 몸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건강 관련 박사가 되어도 될 만큼의 지식이 쌓였다.


잘못된 식습관 때문에 우리 몸은 병들게 된다는 당연한 이치를 깨우치지 못한 채 그저 입에 달고 몸이 편한 조미료와 설탕이 가득한 인스턴트나 사 먹는 음식에 내 몸을 40년 간 맡겨왔으니 지금부터라도 식습관을 전부 바꾸면 몸은 서서히 건강해질 수 있을 거란 강력한 믿음이 생겼다.


8년간 무럭무럭 자란 암세포가 종양이 되어 몸속에 자리를 잡았는데 하루아침에 암세포가 몸에서 사라지게 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항암으로 진행되어오던 암세포의 성장을 일단 차단하고, 서서히 내 몸이 회복될 수 있도록 몸에 좋은 음식들을 챙겨 먹는 것으로 다음 차수 항암이 들어가기 일주일 전은 몸과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백혈구 수치가 정상 범위 안에 있어야 다음 차수 항암을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항암 마지막 주에는 백혈구 생성에 도움이 되는 소고기도 기름기 없고 소화가 잘 되는 안심으로 챙겨 먹었다.


항암 중에는 체력이 떨어지면 독한 약물 치료에 견딜 수가 없으므로 채식만 고집하지는 않았다.


설탕과 지방을 제외한 영양가 있는 음식을 챙겨 먹으려고 노력했고 아프기 전까지는 잘 챙겨 먹지 않던 비타민과 무기질도 회복기인 마지막 일주일 간은 열심히 챙겨 먹었다.


항암 약이 암세포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세포는 회복이 빨리 될 수 있도록 보충제가 필요했다.


비타민이나 무기질도 항암 중에 먹으면 항암의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는 연구 논문도 나와 있었지만,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비타민과 무기질이라면 장기에 부담을 주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항암 약 투여 후 2주 차가 지나면, 다음 차 수 전 1주일은 손상된 정상 세포들을 살려내는 데 최선을 다했다.


각종 야채, 과일을 비롯한 아연, 마그네슘 등의 무기질이 정상적인 세포를 보호하는 데 필요하고 신경과 근육 기능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하니 섭취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항암 중에는 그야말로 양질의 단백질과 비타민, 무기질 섭취에 신경을 써서 면역체계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관리를 했다.


그 외에 힘들어도 빠지지 않고 한 것이 걷기 운동이다. 매일 식사 후 삼사십 분 정도는 꼭 동네 산책을 하거나 집에서 실내 자전거를 탔다. 소화가 잘 되는 것은 물론이고 혈액이 순환되면서 몸이 가뿐한 기분이 들었다.


서울에 살 땐 지하철만 타고 이동해도 하루 만보가 저절로 걸어졌는데 제주에 내려오고 난 이후로는 되려 걷는 시간이 줄었다. 산으로 바다로 매일 걸으러 다닐 것 같지만 서울 사는 사람들이 롯데 타워에 자주 안 가듯이 제주도에 산다고 한라산에 매일 가는 것은 아니다.


지난 5년 간은 바쁘다는 핑계로 차만 타고 다녔지 발을 땅에 내딛고 걸은 시간이 하루 평균 십 분도 채 되지 않았다. 식 후 삼 십분 정도만 걸어도 소화가 잘 되고 몸이 가뿐해지는 간단한 원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해서 몸을 움직이지 않은 것도 발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식 후에 꼭 몸을 움직여서 소화를 시켰다. 항암 치료의 시작으로 나의 생활 습관과 식습관도 개선되기 시작했으니 암의 발현이 나에겐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전 01화 아이에게 암을 전달하는 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