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겠다고 '명령'하라.
2021, 22년은 코로나라는 기이한 바이러스가 세상에 침궐하여 세상 사람 모두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역사에 길이 남을 시간이었다.
남들은 한 번씩 모두 걸렸고, 백신 접종도 국가적으로 마무리된 대 유행병의 커튼 콜 앞에서 그만,
나는 코로나에 덜컥 걸려버리고 말았다.
항암이 이제 막 끝난, 백혈구 수치가 간당간당한 암환자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란...
가혹하고도 지독해서 열을 동반한 기침이 한 달 이상 끊이질 않았고, 목은 부어올랐으며, 내 몸의 모든 수분을 뱉어내고도 남을 만큼의 콧물과 가래와 땀을 분출시켰다. 문제는 잦은 기침으로 인한 호흡곤란 증상이었는데,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러다 숨 막혀 죽겠구나... "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항암 치료가 끝난 후 코로나 백신도 맞았건만,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는 동안 그야말로 사경을 헤맸다. 일주일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는 증상에, '열 흘후면 좋아지겠지'라고 예측했던 것과는 달리 2주가 지나도, 3주가 지나도 코로나 감염으로 인한 증상은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폐를 침범했는지 밤낮으로 기침이 나와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수면을 취해야 면역이 생기고 자면서 면역 세포가 바이러스를 잡아먹을 텐데, 기침이 나오고 숨이 가빠서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잠이 들려고 하면 이내 가래가 올라오고 기침이 나면서 숨도 쉬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한 달을 잠을 못 자고 기침을 해 댔더니 거의 폐인이 되었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잠을 자지 못하니 정신도 피폐해졌다. 신경은 예민해 질대로 예민해져 자칫 누군가가 나를 건드렸다간 된서리를 맞을 것처럼 날이 서 있었고, 폐에 전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숨을 쉬기가 힘들었기에 나는 찾아오지도 않은 전이암을 두려워하며 공포에 몸서리쳤다.
잦은 기침으로 기력은 쇠했으며 기력이 없으니 입 맛도 없었다. 먹고 싶은 욕구가 없어지니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그 어려운 항암치료를 1년 6개월이나 받았을 때에도 정신이 이렇게 무너지지 않았는데, 코로나로 숨이 가빠지니 죽음의 공포는 극도에 달하여 찾아오지도 않은 불행 속으로 헤엄 쳐 들어갔다.
'몸이 괴로우니 사람이 이렇게 죽고 싶구나... 살아 숨 쉬는 게 고통이네....'라는 생각이 하루에 수십 번씩 들었다. 중증 환자들이 왜 삶을 스스로 마감하고 싶어 하는지 공감이 되었다. 며칠 간이었지만 나도 내 스스로 목숨을 내려놓고 싶었으니 말이다.
한 달 정도가 지나니 다행히 기침도 멎고, 코로나 증상은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호흡은 계속 가빠서 누구와 대화는커녕 문장 하나를 말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한 마디를 내뱉기 위해 큰 숨을 들이마셔야 했고, 또 한 마디 하려면 또 깊게 심호흡을 해야 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호흡이 어려웠다. 전화 통화조차도 어려울 정도로 숨이 가빠서 전화벨이 울리면 스트레스로 몸이 굳었다.
'젠장, 산 넘어 산 이구먼!'
이제 항암치료가 끝나서 좀 살아볼까 했더니, 코로나 후유증까지 폐에 고스란히 남았다. 암세포는 항암치료를 받고 수술로 제거가 되었는데, 코로나 후유증에는 딱히 약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를 두고 병원에 입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달을 코로나와 싸우느라 침대에 거의 누워서 지내던 어느 날.
'이렇게 살다 간 패혈증이나 폐에 염증으로 죽을 수도 있겠네!'
'살아야겠다!'
결심하는 순간, 우리의 뇌는 변한다고 했다.
'죽지 않고 살려면 뭘 해야 하지?'
'숨을 잘 쉬어야지...'
'숨을 잘 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공기가 맑은 곳에 가서 걸어야겠지.'
'공기가 맑은 곳? 여기 제주도잖아!... 천지가 공기 좋은 오름이고 바단데?... 일단 폐활량이 좋아지려면 좀 높은 곳에 오르는 게 좋겠지?'
'기력이 없고 힘드니까 가까운 곳으로 가자!'
나의 뇌는 내가 살아야겠다고 '명령'을 내리는 순간, 살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들을 송신해 주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었으므로 바다보다는 산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근처엔 걷기 좋은 한라 수목원이 있었다.
건강할 때는 이렇게 훌륭한 자연이 곁에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막상 환자가 되어 수목원을 걸으니 나무에서 뿜어내는 피톤치드와 산소가 생명의 양식 같았다. 제주에 산 지 6년이 지나도록 수목원 안 쪽 끝에 오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환자가 오르기에도 부담 없는 작은 동산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오를 때는 숨이 가빠서 오르다 말고 큰 숨을 여러 차례 헐떡였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어찌나 무겁던지 건강한 사람은 20분이면 완주할만한 정상이 끝도 없이 멀리 느껴졌다. 폐가 망가져도 단단히 망가진 것이 분명했다. 오르는 동안 호흡이 어려워서 몇 차례 멈춰 섰지만 막상 정상에 오르니 호흡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16번의 항암치료 후 코로나 후유증까지 떠안은 나는 30분이나 걸려 작은 오름을 등반했지만, 그 성취감은 갓 난 아이가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 부모의 마음처럼 벅찼다. 2년 만에 운동다운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그랬던 건지 살아있음을 느꼈다. 어제까지만 해도 숨을 쉬지 못해 죽을 것 같더니 말이다.
광이오름의 정상에서 한라산의 정기를 마실 수 있게 되니 다시 한번 생존의 비책은 '신선한 공기'와 '건강한 호흡'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삶에 대한 희망을 다시금 품게 된 나는, 그날 이후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 한라 수목원의 광이오름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말이다. 처음 일주일 간은 30분 오르는 비탈길도 오름이라고 정말 숨이 가빴다. 유방암 제거수술 시 했던 전신마취는 나의 폐기능을 극속도로 저하시켰으며, 그 후 찾아온 코로나 바이러스는 나의 폐를 거의 마비 수준으로 만들어 정상호흡을 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폐는 망가져도 처방약이 없기에 내 몸의 자가 능력으로 치유하는 수밖에 없었다. 폐를 살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걷고 또 걷는 일뿐이었다. 평지를 걷는 것은 폐활량에 자극이 크게 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오르막이 있는 오름을 천천히 그리고 묵묵히 매일 걸어 올랐다.
처음 일주일은 30분 광이오름이 한라산 관음사 코스처럼 어렵게 느껴졌지만, 열흘이 지나니 이전처럼 헐떡이지 않으면서 정상에 오르게 되었고, 보름이 지나니 마치 평지를 걷듯 가뿐히 오를 수 있었고, 한 달이 지나니, 나는 광이오름의 다람쥐가 되어 있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서너 달이 지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의 폐는 정상호흡을 하는 데 무리가 없을 만큼 좋아졌고, 광이오름의 수호신이 지켜 주신 탓인지 수술 후 1년(진단 후 3년) 검사에서는 암세포 전이 없음으로 판명됐다. 진단 전 갖고 있던 하이 콜레스테롤 수치와 높은 대장암 종양지표 수치 등에서도 모두 정상임을 판정받았다.
건강을 지키는 비밀병기는 매일 조금씩 하는 운동에 있었다. 나는 폐활량과 혈액순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매일 숨이 약간 가쁘도록 운동하는 것을 몸에 인이 베이도록 반복했다.
그렇게 한 계절, 두 계절을 지내고 나니 완치에 한 발짝 가까워지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자연의 생명력 안에서 나의 몸은 서서히 치유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