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떠나간 사람들이 주는 교훈
“아직도 살고자 하는 자가 있다니,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정녕 싸움을 피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냐? 더 이상 설 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 목숨에 기대지 마라!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고, 또한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이 말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으면서 죽을 각오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심어주기 위해서 한 말이다.
나는 죽음을 각오했었다. 4년 전이었고, 앞으로 남은 생이 얼만큼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췌장암, 대장암 종양 지표가 이상하리만큼 높았고, 난소 양쪽엔 거대한 혹이 달려 있었으며 예후가 썩 좋지 않다는 삼중음성 유방암에 걸렸다고 했다.
전이암을 예측했던 의사는 수술부터 하려던 시초의 계획을 돌려서 항암치료부터 시작했고, 항암 약이 잘 들어 암세포가 줄어든 경우도 있었으며, 잘 듣지 않아 건강한 세포들만 사멸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2년이 지났다. 2년이 조금 못 되는 시기에 항암 치료는 모두 완료되었으며, 항암 치료 중에 혈압이 떨어져서 의식을 잃고 잠시 저 세상 구경을 다녀온 적도 있고, 치료가 끝난 후론 코로나에 걸려서 숨을 쉬지 못하다가 저 세상으로 갈 뻔했던 적도 있었다. 항문과 질이 전부 헐어서 화장실에 가는 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나날들이 있었고, 이렇게 사느니 죽느니만 못 하다는 나쁜 생각을 품고 우울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시간들도 있었다.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는데 지옥 같던 그 시간을 어떻게 헤어 나왔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그냥 참고 견디어 내다 보니,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들 또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평소 좋아하던 배우 김수미 씨가 생을 마감한 날, 암 환자였던 나는 여전히 생존해 있었고, 범인의 평범한 여느 날처럼 일상을 시작했다. 아침엔 거실 창을 활짝 열어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공기를 마셨고, 일어나기 힘들어 부비적 거리는 아이의 다리를 주무르며 훌쩍 길어진 아이의 다리길이에 감탄을 했다. 내가 암진단을 받을 당시 열 살이었던 꼬맹이는 키가 어른만큼이나 큰 사춘기 소녀가 되어 있었다. 최근 인스턴트를 꽤 많이 먹은 아이를 위해 채식 아침을 차려주고, 유튜브의 음악을 검색해 이문세의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 재생해서 들었다.
잠시 고인이 된 김수미 씨를 애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시에 지난 4년 간 곁에서 함께 투병을 했지만 이미 작고한 환우들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투병하는 동안 나의 가이드라인이 되어 준 언니가 있었는데, 나와 처지가 같은 삼중음성 유방암 환자였고 병기와 종양의 크기마저 비슷했으며 매사에 열정적이며 완벽주의자 같은 성향마저 나와 흡사한, 제주도에 살고 있는 매우 특별한 인연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치료가 힘들게 진행될 것이라고 미리 귀띔을 해줬고, 본인이 겪었던 항암 부작용들을 상세히 전달해 주었으며 나 보다 정확히 1년 6개월을 앞서 항암치료를 마쳤던 나의 롤 모델 같은 선배 환우였다.
평생을 수학 교육을 하며 살았던 그녀는, 본인은 운이 좋아서 코로나 대 유행의 시작 전에 16번에 거친 항암 치료를 모두 마쳤다고 했다. 제주도에서 서울로 통원을 하며 힘들었지만 전부 극복했다고 스스로 대견해했다. 치료 중 고열로 쓰러져 응급실에 몇 차례 다녀왔고, 발바닥의 괴사로 치료 마지막 즈음엔 걷지도 못했다던 선배는 두 번 다시 항암치료를 받느니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그 녀는 항암치료가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단 한 번도 아파본 적 없는 사람처럼 삶에 대한 의지를 불살렀다.
진단받기 전 시작한 대학에서의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대학에 수업을 들으러 다니는 한 편, 건강한 사람들도 하기 어려운 카페 창업도 단행했다.
순간, '본인이 암 환잔데 무슨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려고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나의 항암치료에 집중하느라 다른 이의 인생에 참견하여 왈가왈부할 여력이 없었다.
동네 네일 숍 사장의 소개로 알게 된 인연이다 보니 안부 연락은 서너 개월에 한 번 정도로 드물었으며, 나는 항암치료 중인 환자였으므로 무엇보다 치료가 먼저 끝난 선배 환우의 무탈을 기원했다.
삶에 대한 의지가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는 끝내 대학에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60을 한 살 남겨둔 나이에 컴퓨터로 리포트를 써내는 일이 익숙지 않아 힘들었지만 졸업을 해냈다고 자부했고, 새벽부터 열어야 하는 테이크아웃 카페는 혼자 운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고 했다.
그즈음 나의 항암 치료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죽을 것만 같은데, 아무렇지 않게 대학에서 자격증을 취득해 내고 카페를 차려내는 선배 환우의 활약에 쩍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과연 항암치료가 끝난 후에 나는 저렇게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오래된 치료로 약해진 잇몸 때문에 이빨은 여기저기 흔들리고 있었고, 세포가 손상돼 시커멓게 변해버린 살 갗 위론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려서 젓가락으로 반찬을 잡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치료가 전부 종료된 이후로도 꽤 긴 시간 동안 나의 몸은 이전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신경세포와 상피세포, 말초신경이 모두 손상돼 글 쓰는 일 같은 소소한 일상조차도 다시는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힘을 얻고 싶었다. 나도 선배처럼 다시 강단에서 강의도 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위로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항암치료가 마무리된 후, 오랜만에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선배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달리 힘이 없었고, 암이 림프로 전이가 되었다고 했다. 그 사이 사랑하는 친동생이 췌장암으로 죽었고, 슬픈 마음을 잘 추스르지 못했다고 했다.
"항암치료가 너무 받기 싫어. 죽기보다 더 싫어! 그때 고생했던 거 생각하면 다시 받을 자신이 없어..."
선배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는 그 정도로 싫으면 항암치료는 받지 않는 게 어떻냐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의사도 아닌 내가 감히 생명을 앞에 두고 어떠한 선택도 권유할 수가 없었다.
통화한 지가 열흘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핸드폰 문자로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나에게 치료의 나침반이 되어 주었던 선배언니는 재발된 암의 항암치료를 시작하자마자 패혈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며칠 전 멀쩡하게 나랑 전화통화를 했던 사람이 죽었다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죽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삶과 가까이에 있었다.
살고 싶다고 울부짖던 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삶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치료가 끝나자마자 다시 이전의 라이프 스타일로 복귀했던 언니의 선택이 원망스러웠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이 뭐 대수라고... 본인 보호나 잘하지! 아픈 사람이 카페는 왜 차려? 건강한 사람도 카페를 차리면 골병이 나는 마당에!'
'죽을라고 환장을 하지 않고서야....!'
나는 혼란스러웠고 나에게도 같은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가 나의 앞으로의 삶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나는 언니의 죽음을 보며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한 설계도를 변경했다. 건강해지면 다시 일로써 활약하겠다는 자만은 쓰레기 통에 버렸다. 앞으로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하는 강의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소통하는 것이 좋아서 밤을 새우며 강의를 준비했고, 그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삶의 원동력이라 착각하며 살아왔다. 몸을 아끼지 않고 돈과 명예를 좇다가 암이라는 병에 걸려 하마터면 짧게 생을 마감할 뻔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니 모든 것이 현명하게 보였다. 내 인생이 유한하다는 사실 그리고 내일이라도 생을 마감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교훈은 생각보다 영향력이 컸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변경되었으니 말이다. 남한테 받는 인정 따위 중요치 않으니 명예욕은 버리고, 돈도 죽을 땐 가져갈 수 없으니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중요한 것들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었고, 필요 없는 것들은 미련 없이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삶이 생각보다 심플하고 단순했다. 복잡하게 만드는 건 우리 자신일 뿐이다.
부질없는 욕심은 모두 내려놓고, 식이요법, 면역 치료, 운동에 사활을 걸었더니 진단 후 4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무탈하게 생을 유지하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김수미 씨가 향년 75세로 생을 마감한 것을 보니, 이제 곧 칠순을 맞이하는 엄마도 걱정이 되었다.
내가 투병하는 동안 마음고생이 누구보다 많았을 엄마와의 시간도 어쩌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형편이고 뭐고 따질 것 없이 엄마와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내일모레면 오르게 될 싱가포르행 비행기 안에서부턴 내가 엄마의 보호자가 된다. 승무원 시절 해외여행이라곤 두바이에 딱 한 번 모신 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지금부턴 기회가 될 때마다 엄마를 모시고 세상구경을 시켜드릴 예정이다.
인생은 짧은 여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