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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Nov 14. 2019

가끔은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기회

두 번째 학기의 내 최대 관심사는 인턴십이었지만, 이 시기에 나의 남은 1년을 좌우할 큰 사건들이 생겨났다. 그중 첫 번째는 학기 중간에 새롭게 추가된 'Corruption, South Korea, and the 2018 Winter Olympics 프로그램'이었다. 3월 초에 이 수업이 신설되었다면서 이메일로 공지가 왔지만 정작 나는 이메일을 확인하지 못했다.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 하루에도 정말 많이 오는 이메일을 일일이 확인하기가 참 버거웠다. 특히 영어를 읽을 때는 집중을 하고 읽어야 내용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냥 제목만 대충 눈으로 훑었을 때 중요한 이메일을 확인 못 하기도 해서 나중에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듣고서야 중요한 이메일을 확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이 이메일도 수많은 이메일에 묻혀있었다.


"Corruption in International Sports"


그 이메일이 도착하고 이주 뒤 어느 날, 수업 시작하기 몇 분 전 친구들이 다 앉아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암묵적인 규칙 같은 느낌으로 지난 학기부터 이번 학기까지 모든 학생들은 첫 시간에 앉은자리 그대로 계속 앉아왔고, 나도 계속 첫 번째 줄에 앉았다. 그리고 지난 학기부터 모든 수업 시간에 내 오른쪽 옆에 앉은 친구가 정말 거의 처음으로 먼저 나한테 말을 걸었다.


“한국에 가는 프로그램 신청했어?”


“한국? 우리 학교에 한국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있어?”


“응. 이메일 왔는데, 학교에서 한국에 여행도 보내준다고 해서 지금 친구들이 다 신청을 하고 싶어 해. 그런데 너

는 한국인이니까 벌써 신청한 줄 알았지.”


“정말? 난 이메일 못 봤는데, 그런 거 있으면 나도 당연히 신청하고 싶지. 그 이메일 제목이 뭐라고 되어있어?”


“한국이라고 쳐도 나올걸?”


“진짜? 고마워! 확인해볼게.”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신청 기간이 끝나고서야 그 프로그램에 대해 전해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날 점심때 그 프로그램의 informational meeting이 있는 것을 알고 이야기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오후 친구 말대로 한국을 검색해 봤더니 이메일이 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건 나를 위해 예비된 수업"


'Corruption, South Korea, and the 2018 Winter Olympics'라는 제목의 이메일 내용을 읽어 내려갈수록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한국이 2018년 올림픽을 개최하는데, 그전에 2016년 가을학기와 2017년 봄학기에 걸쳐 1년 동안 한국이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부정부패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 대해 조사하고 2017년 봄방학에는 한국에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는 수업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계속 읽어나가면서 눈이 휘둥그레지고 소름이 돋았다. 교수님께서 짧게 덧붙여 수업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는데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처음 시작한 수업이었고, 그때도 1년 동안의 수업이었고, 2015년도에 학생들과 브라질을 다녀오면서 학생들이 개인 경비를 댔었다고 나와 있었다. 그 뒷줄에는 이번 수업에서는 로스쿨 학장님께서 경제적 문제 때문에 참여를 못 하는 학생이 나와서는 안 된다면서 강하게 의견을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아직 경비를 어떤 방식으로 댈지는 결정을 못 한 상태라고도 나와 있었다. 다음 학기부터 1년 동안의 수업이기 때문에 1L과 2L만이 지원을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내용을 읽고는 순간, 이 프로그램은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로는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이었다. 거의 백인들로 가득한 이 사립 로스쿨에서 유일하게 공부하고 있는 한국 학생으로서 학교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아시아의 North Korea인지 South Korea 인지도 잘 모르는 나라에서 온 낯선 학생으로 대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무엇인가 한국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있을 거라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학교에서 소수인종으로 지내면서 미국의 문화에 맞추려고 노력하며 외로움을 느끼며 살던 한국 사람이란 내 출신이 오히려 나를 이 프로그램에 뽑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전율이 흐를 지경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한국에 대해 조사하는 것인데, 학교에 한국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내가 단 한 명밖에 없는 한국 사람이고 더구나 로스쿨에 오기 전까지 계속 쭉 한국에서 살았으니 한국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교수님이 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꼭 필요할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두 번째는 한국으로의 여행이었다. 로스쿨에 온 지 한 달 정도 됐을 무렵부터 로스쿨 적응도 힘들고, 전혀 문화가 다른 미국인 친구들과는 속 깊은 이야기도 할 수가 없어서 온전히 혼자라는 느낌에 정말 집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행기 티켓이 비싸서 차마 갈 수 없었다. 내 힘으로는 한국에 방문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단순히 한국 올림픽에 대해 조사만 하는 게 아니고 한국으로 여행도 보내주고, 지난 올림픽 수업과는 달리 이번 여행은 경비도 학교에서 대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기적 같이 느껴졌다.


세 번째는 시기가 예술이었다. 정말 딱 맞았다. 2016년 브라질 올림픽과 2018년 한국 올림픽은 2년간의 공백이 있어서 매 학기마다 열리는 수업도 아니었고, 수업이 열리기 전 학기에 다음 학기부터 2L과 3L이 될 학생들만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기 때문에 시기를 잘 타야 했었다. 그래서 내가 2015년 가을학기에 2L로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일 년 더 빨리 2L로 입학했으면 성적도 높지 않은 내가 나랑 관련도 없는 브라질 올림픽에 뽑힐 리 없었고, 한국 올림픽에 신청할 자격도 없었을 것이다. 일 년 뒤에 입학했다면, 이미 한국 올림픽을 위한 팀이 짜여서 첫 번째 학기를 보내고 있을 테니 아예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정말 딱 맞는 연도에 입학해서 한국인이라는 치트키를 가지고 뽑힐 가능성이 높은 한국 올림픽 관련 프로그램에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던 것이 놀라웠다.


"처음으로 자신 있게 도전!"


아직 인턴십도 못 구해서 시무룩해 있을 때였지만, 정말 날고 긴다는 1L과 2L의 많은 학생들이 이 프로그램에 신청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조금 더 주눅이 들었지만, 한국인이라는 뒷배경 하나로 자신 있게 지원했다. 로스쿨 생활하면서 무엇인가를 지원할 때 이렇게 자신감 있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지원서를 내고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교수님께서 질문하셨다.


“왜 너는 이 프로그램에 지원하게 되었니? 내가 왜 너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속으로 웃으면서 자신감 있게 열심히 몇십 번을 되뇌면서 연습한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저는 이 로스쿨의 유일한 한국인입니다. 저는 이 로스쿨에 진학하기 전 25년 동안 한국에 살아서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한국의 정보에 대해 다 말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알려드릴 수 있는 사람은 이 학교에서 저 혼자뿐입니다. 그리고 올림픽에 대해 조사하면서 한국어로 된 뉴스 기사는 저밖에 읽을 수 없습니다. 한국의 큰 신문사들에서 내는 더 깊은 내용의 한국어로 쓰인 기사들과 그중에서 영어로 번역된 몇 안 되는 기사들은 내용의 수준 차이가 클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교수님과 팀원들 같은 미국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까지 다 설명해 드릴 수 있고, 이 로스쿨에서 그게 가능한 사람은 한국인인 저밖에 없습니다.”


수업 듣는 것 외에 학교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한 번이라도 뽑히고 싶었기 때문에 교수님께 아주 극단적으로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비용에 대해서도 질문을 드렸는데, 만약에 비용을 내야 한다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을 거라고 미리 말씀을 드렸다. 사실 그즈음 여름방학 동안 영국에 가서 여름 계절학기 수업을 듣고 인턴십도 하는 프로그램도, 워싱턴 D.C. 에서도 한 학기 동안 인턴십 비슷하게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 등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정말 쏟아져 나왔다. 그렇지만, 감히 신청할 수도 없던 것은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부담되는 비용이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프로그램은 차마 욕심도 내지 못하고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러던 차에 학교에서 한국으로 여행 경비를 대줄 것 같은 가능성을 가진 프로그램이 나왔으니 꼭 잡고 싶었다. 다른 학생들도 다른 프로그램들과는 다르게 이 프로그램은 참가비를 내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서 정말 많이 신청했다고 들었다. 막상 자신감 있고, 터프하게 인터뷰를 보고 나왔지만 내 1학기 성적이 좋지 않아서 걱정하면서 결과를 기다렸다. 드디어 3월의 마지막 주 나를 포함해 뽑힌 8명의 친구들과 함께 교수님으로부터 합격을 암시하는 이메일을 받았다. 첫 번째 기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거대한 게이트가 터져버렸다"


2016년 봄학기 중반에 한국 올림픽 부정부패 조사팀이 꾸려졌고, 가을학기부터 장장 1년 동안 이어질 수업을 기다렸다. 내가 팀에서 유일하게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부담을 가지고 수업 준비를 위해 여름부터 특별히 올림픽과 관련된 소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즈음부터 놀라운 뉴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르 스포츠 재단에서부터 시작된 불씨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필 우리가 올림픽 개최와 관련된 부정부패 조사를 시작하려는 학기 직전에 이런 큰 게이트가 터질 줄이야. 그때는 앞으로 몇 개월 뒤에 일어날 일도 차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가을학기 시작부터 올림픽과 관련한 부정부패 기사가 쏟아지자 교수님과 우리 팀은 올림픽을 개최하는 국가에서 부정부패 스캔들이 벌어졌다는 것에 안타깝기도 했지만 우리가 할 조사에 더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겠는가. 로스쿨에서 한국 학생은 나뿐이었는걸."


나는 초반에 우리 팀이 모였을 때,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설명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나도 한국에서 학생으로만 있었지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했던 것이 아니라 미국 사람들이 생소할 만한 한국의 역사와 아시아권에 있는 한국의 특별한 문화에 대해 중점적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로스쿨에 와서 내가 한국에 대해 이렇게 깊이 있게 설명하는 것을 미국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낯설었지만, 그래도 내가 말해주는 것이 이들에게는 한국에 대한 첫인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많은 내용들 중 그들이 특히 감명받았던 것은 우리나라가 한국 전쟁 직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했던 나라라는 것이었다. 그 가난했던 나라가 불과 몇십 년 만에 세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것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대략적인 설명을 마친 후 각자 조사할 분야를 나누어서 글을 쓸 부분을 나누었다. 한국의 역사, 문화, 부정부패 방지법, 게이트 등 주제를 나누어 각자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할 계획을 세웠다. 나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그중에서도 제일 최신 내용을 다루는 주제에 당첨이 되었다. 올림픽과 관련한 스포츠 분야에서 먼저 부정부패 기사가 나오고 그 부정부패가 점점 정치권으로 커져가는 것을 보면서 하루에도 열 개가 넘는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올림픽과 관련한 부정부패를 실시간으로 보면서 보고서를 작성할 사람은 이 팀에서 나밖에 없었다. 교수님 지도하에 나는 올림픽과 관련된 부정부패를 중점적으로 조사를 하게 되었고, 이미 책과 논문과 온라인상에 나와 있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보고서를 쓰는 게 아니라 정말 매일매일 새롭게 업데이트되는 생생한 내용을 정리해서 쓰다 보니 올림픽을 앞두고 커져가는 게이트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무섭게만 느껴졌다.


내가 보고서를 쓰는 주제가 다른 학생들이랑 다르게 실시간으로 새로운 정보를 수집해야 했고, 또 동시에 책과 논문들에 있는 정보도 모아야 했으니 처음에 어떤 방향으로 글을 써야 할지 방향성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교수님과 계속 미팅하면서 보고서를 써내려 갔다. 교수님께서도 처음에는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나랑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한국 문화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나한테 하나씩 배워가시면서 시작을 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내가 처음에는 교수님께서 생각했던 것만큼 기대에 못 미쳤던 것 같았다. 그 마음이 너무 잘 느껴져서 미팅끝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서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우리 학교에서 한글로 쏟아져 나오는 뉴스 기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분석해서 영어로 보고서를 써줄 학생은 나뿐이었는걸. 가을학기는 그렇게 팀 미팅을 하고, 교수님과 미팅을 하면서 보고서를 썼다.


"A라니"


이제 본 게임은 내년 봄학기이자 내 마지막 학기였다. 봄학기에 한국인 교수님이 처음으로 우리 학교에 오시게 되었다. 그 교수님도 우리 팀에 같이 합류해서 봄방학 동안 한국에 같이 가셨다. 봄방학 일주일 동안 한국에 머무르면서 서울에서, 평창에서 많은 분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고, 그분들의 생생한 말씀들을 들었다.  


그동안의 조사와 한국에서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완성해가면서 교수님의 칭찬을 받게 되었다. 사실 한국여행 막바지부터 교수님께서 갑자기 성장한 나의 모습을 보셨는지 교수님으로부터 여태 느껴보지 못했던 기류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니면 한국에 와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여태 내가 보여드렸던  한국 특유의 것을 이해하셨는지도. 나는 딱히 다를 게 없었는데 학기 중반을 넘어가며 보고서가 점점 모양새를 갖춰가고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시고는 교수님께서 툭하면 칭찬을 해주셨다.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조사해서 보고서를 써가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보고서가 멋지게 쓰이고 있다고 격려를 해주셨다. 이런 칭찬에는 뭐라고 대답해야될지 몰라 그냥 부끄럽게 웃으면서 땡큐라고 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나에 대해 자신이 없었으니 칭찬들을 때마다 믿기지 않았다.


IBP 수업처럼 후반부에 가서 교수님께서 나의 완성 막바지에 다다른 보고서를 보시고는 정말 조사를 잘하고 잘 썼다면서 칭찬을 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인정받아서 기쁘고 재미있게 마무리를 했다. 여전히 무엇이 교수님을 감동시켰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교수님들과 함께 방향을 잡아 나아갔는데 보고서가 완성될 즈음 어느 순간부터 교수님들이 최고라고 정말 잘하고 있다고 격려를 받게 되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조사를 잘하고, 글을 잘 쓰고 있다는 안심과 확신을 가지고 하던 대로 열심히 보고서를 쓰고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교수님께서도 원래는 A를 주고 싶었다고 하셨지만, 학생 수가 제한되어 있는 수업이어서 최고로 줄 수 있는 점수가 A-라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A를 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말을 듣게되다니...감히 내가. 정말 첫 학기 막막했던 날들을 떠올린다면 차마 내가 꿈꿀 수도 없던 화려했던 마지막 학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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