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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Nov 14. 2019

기적은 내가 기다리다 지쳐

포기할 때쯤

기적을 믿는 사람들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기적에 별 감흥이 없는 사람들은 삶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도 그저 운이 좋았다며 지나칠 수도 있지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며 가끔 티비에 소개되는 사연들을 보면 로또에 여러 번 당첨되는 사람들도 있고,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으로 죽을뻔한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고, 사망 선고를 받은 후에 심장이 다시 뛰어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다. 지금은 이성과 지성이 지배하는 시대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적에 관해서라면 나는 항상 ‘관찰자’의 입장이었다. 성경에 나온 기적들을 봤고, 누군가의 삶에 일어난 기적에 관한 책을 읽었고, 티비에 나오는 특별한 일들을 부러워하며 멀리서 지켜만 봤다. 기적을 바랐지만, 나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들에만 둘러싸였다.


부모님 품을 떠나 혼자 미국에 와서 누구에게도 온전히 기대지 못한 채, 엄두도 나지 않는 모든 일들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그때서야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살 때는 단순히 좋은 일로 치부하고 넘어갔을 모든 일들이 하나, 둘, 셋... 셀 수도 없이 기적으로 다가왔다.


미국에서 살면서, 로스쿨에서 생활하면서 항상 부족했던 나에게 연속적으로 기적이라 부를 만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하면서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 그리고 과거에도 내가 무심코 지나친 기적들도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니 내 삶은 기적들로 가득했다. 지금도 여전히 내 삶을 뒤돌아보면 기적들로 가득하다. 안타까운 것은 어떤 기적들은 그 순간이 지나고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면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는 것. 감사하게도 그때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기적에 예민하던 터라 나는 모든 기적을 바로 생으로 느낄 수 있었다.


"Summer Internship"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첫 학기 중반부터 인턴십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제일 선호도가 높은 인턴십은 단연 judicial clerkship이었다. 법원에서 판사의 서기관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이 신청했다. 버지니아주 법무부 Attorney General’s office 인턴십도 인기가 많았다. 그다음으로 내가 관심 있던 형법 분야에서는 국선 변호사 public defender와 검사 commonwealth’s attorney 오피스에서의 인턴십이 인기가 있었다. 나는 캠퍼스를 벗어나면 부담해야 할 집값과 교통편이 걱정되어서 캠퍼스에서 가까운 리치먼드 다운타운에 인턴십을 구하고 싶었다. 정말 미국 대학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여름방학에도 계속 기숙사에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캠퍼스 주변에 있는 clerkship, 검사, 국선 변호사 오피스에 지원했다. 나는 영어가 미국인만큼 유창하지 않은 외국인이었고, 첫 학기 성적은 엉망이고, 좋은 스펙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내가 객관적으로 나를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보면 정말 보잘것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안될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모를 기적을 기대해봤다.


새 학기가 개강한 후, 1L들의 관심거리는 단연 인턴십이었다. 인사말이 바뀌고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


"인턴십은 구했어?”


어떻게 벌써 구했는지 우리 반에도 인턴십 결정이 난 학생들이 절반 정도가 있었다. 아직 결정 나지 않은 다른 학생들도 인터뷰를 보는 중이었다. 로스쿨에 관해 많이 아는 1L 친구들로부터 아무리 늦어도 2월 전까지는 인턴십이 결정 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그때까지도 못 구한 학생은?


어쩜 교회분들도 학교 일정에 빠삭하신지 예배 후 리셉션에서 나를 보면 처음 묻는 인사가 똑같았다.


"인턴십은 구했니? 여름 방학 계획이 어떻게 되니?"


아직도 인턴십을 못 구했고, 여름 방학 계획은 아직 없다고 말씀드렸다. 걱정하는 내게 교회 분 중에 한 분이 Attorney General's Office에도 지원해보라고 알려주셨다. 그분 말씀대로 거기도 지원해보고, 사교 자리에서 만나는 많은 분들께 인턴십 자리를 여쭤보기도 하고 이력서를 보내보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 와중에 법원으로부터 거절의 편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래도 법원이라 예의를 차려서 답장해준 거지 다른 곳에서는 아예 소식도 없었다.


2월은 다가오는데, 친구들과 교회분들의 질문에 나는 할 대답이 없었다. 내 어드바이저와의 만남도 잦아졌지만 변한 건 없었다. 이제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이 주제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일 부러웠던 건 부모님 친구 오피스에서 인턴을 한다는 친구들이었다. 미국 사회가 네트워크를 중요시 생각하고 인맥을 중요시 생각하는 만큼 대학 입학부터 일자리까지 모든 곳에는 그곳에 연결시켜줄 만한 가족이나 친척, 또는 아는 지인들이 있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나는 옆에서 지켜봤다. 나도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배운 문화였다. 그곳에서 내가 가진 인맥이란 교회 사람들이 전부였다.

 

“I’m still applying to the offices. I had an interview, but I've not heard back from any of them yet.”


설마 아직도 인턴십을 못 구한 친구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의례적으로 내뱉는 친구들의 인사말에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들으면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친구들에게 괜찮다고 하면서 그 아이들의 인턴십과 여름방학 계획에 관해 물어봤고, 부럽기만 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기다리다 지쳐 보험 들어 놓으려 했을 때에야"


이제 나의 어드바이저도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슬슬 대체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인턴십 안된다고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인턴십을 못 구한 친구들은 여름방학 동안에 교수님의 RA research assistant로 일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러려면 다른 학생이 RA를 부탁하기 전에 미리 교수님께 부탁드려서 여름방학 동안 교수님의 리서치도와드릴 수 있다고 했다. 2월이 넘어가면서 인턴십에 대한 기대는 이미 접었던 터라 그렇게라도 여름 인턴십 기회를 마련해준 로스쿨에 감사했다. 그렇지만 교수님께 부탁하는 것은 아직 부끄러워서 학기 말에 하려고 미뤘다.


2월이 지나가면서 이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이 느껴져 더는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만남을 요청하면서 인턴십 기회를 조심스럽게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동안 나갔던 수많은 사교 파티에 없는 시간 쪼개가며 나간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아 허전하게만 느껴졌다. 어느새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기말고사를 2주 정도 앞둔 날, 불안정한 미래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결국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한국 올림픽 부정부패 조사팀을 담당하는 교수님께서 우리 모임 할 때 원하는 학생들은 여름 동안 RA를 해도 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도저히 인턴십 자리를 못 구한다면 교수님의 RA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보루로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4월 중순까지 기다리다 교수님께 여름에 RA를 하고 싶다고 바로 오피스에서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드렸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마침 출장 중이셔서 다음 주에 만나자는 답장을 받았고, 다음 주를 기다리며 계속 기말고사 공부를 했다.


사흘이 더 지난 4월 15일 오전, 교수님께 RA는 미뤄야겠다고 말씀드릴 일이 생겼다.


"일어난 기적"


Property 수업을 듣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보통은 노트북으로 워드 파일을 켜놓고 교수님의 말씀을 써 내려가거나, 수업 시간에 알아야 되는 내용들을 인터넷 검색을 하는 데 사용하지만, 지루할 때는 수업 중간중간 이메일을 확인하기도 했다. 하루에도 보통 10통씩 이메일이 와서 매일 확인해야 했다. 로스쿨 학년별 전체 공지가 올 때도 있고, 대학교에서 보낼 때도 있고, association이나 학생들이 이메일을 보낼 때도 있고, 로스쿨 학생들 대상으로 한 광고 이메일이 올 때도 있어서 정말 다양한 이메일이 오는데 너무 많이 와서 일일이 다 확인을 못 할 때도 있었다. 그날도 수업 시간에 심심해서 새로운 이메일들을 하나씩 확인하고 있었다.


새 이메일을 누르고 내용을 천천히 읽어봤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고 놀라운 말이 적혀 있어서 수업 시간이라 차마 소리는 못 내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화면을 계속 응시했다. Attorney General’s office에서 인턴 합격 이메일이 온 것이었다. 사실 계속 거절만 받아서 이것도 거절이려나 생각하며 천천히 문장을 읽어가는데 합격했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내가 상담심리를 복수 전공했던 이력 때문인지 심리와 관련된 부서에 배치받았고, 그 부서는 내가 원했던 형사사건 부서였다. 사실 이 오피스에 지원하게 된 것도 교회분이 말씀해주셔서 지원하게 된 것이어서 바로 교회분, 내 어드바이저, 부모님께 기쁜 소식을 알렸다.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고, 1학기 때 성적이 정말 하위권이나 마찬가지여서 모든 곳에서 탈락만 했던 내가 설마 인기 있는 Attorney General’s office에 합격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정말 좋았던 것은 오피스 위치가 내가 원했던 대로 리치먼드 다운타운에 있어서 어디 멀리 이동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 내가 원했던 대로였다. 그냥 인턴십도 아니고, 정말 우등생만 뽑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Attorney General’s office의 인턴십이 나를 찾아와서 얼떨떨했다. 지쳐서 희망도 버렸을 때 찾아온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 학기가 끝나는 3주 동안 친구들과 교회분들과 인사하면서 드디어 나도 할 말이 생겼다. 누구든 눈 마주치자마자 내가 먼저 드디어 인턴십 합격했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여름방학 동안 Attorney General's office에 내가 원했던 대로 형사 부서에 배치가 되어 두 달 동안 인턴으로 일하면서 검사님들의 일을 보조했고, 바로 옆에서 그분들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배우며 환상적인 여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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