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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Nov 15. 2019

뉴욕으로

모든 일들은 급작스럽게

"선배 찬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열심히 바 시험공부를 한지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지난겨울부터 가끔 대학 선배와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바 시험 준비할 때도 힘든 이야기도 하면서 격려하면서 지냈는데, 그날은 선배가 방금 뉴욕에 있는 로펌에 인터뷰 약속 잡은 것을 취소했다고 말했다. 왜 취소했냐고 물어봤더니 지금 있는 지역 로펌에 취직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방금 취소했으니까 아직 그 로펌에서는 사람을 찾고 있을 거니 네가 빨리 지원을 하라고 했다. 고맙다고 하고 바로 그 로펌에 지원서를 냈다.


몇 시간을 기다리니 정말 로펌에서 연락이 왔다. 인터뷰를 보자는 연락에도 간이 부은 것처럼 내가 당장은 버지니아에 있어서 당장은 안되고 바 시험과 MPRE가 끝난 8월 중순쯤에 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면 며칠 뒤에 화상으로라도 인터뷰를 보자고 해서 인터뷰를 봤고, 또 며칠이 지나자 바 시험을 치고 나중에도 인터뷰 보러 올 생각이 있으면 오라고 해서 인터뷰를 볼 날짜와 시간까지 잡아놨다. 인터뷰 약속을 잡아놓은 것만으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여서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당장 바 시험 걱정만 하면서 시험공부를 했다.  


"뉴욕에도 도와줄 친구가 있었다"


토요일에 MPRE 시험을 치자마자 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짐이 책이랑 옷밖에 없어서 토요일, 일요일 이틀에 걸쳐 하루 종일 박스에 짐을 싸고 월요일 오후에 교회분 도움으로 FeDex에 짐을 부쳤다. 월요일날 방을 비우기로 해서 월요일 저녁에 처음 미국에 왔을 때처럼 이민 가방 두 개를 들고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교회분 가족들이 배웅해주고, 고속버스 정류장에 내려주셨다. 월요일 저녁에 출발해서 뉴욕에 아침 7시 반에 도착하는 버스를 탔다.


버지니아를 떠나 다시 새로운 곳으로 출발하는 발걸음에는 그동안 돌봐주셨던 교회분들과 학교 친구들과 이별한다는 아쉬움과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공존했다. 그분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오롯이 혼자가 되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여태껏 내가 경험해온 기적들 덕분에 나는 겁을 상실했다. 애초에 미국에서 모든 생활은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간 적이 없으니, 어떤 새로운 일이 준비되어 있을까 하루하루 기대감만 커졌다.  


캠퍼스에서 셔틀을 타고 첫 번째 정류장에 내리면 쇼핑몰이 있다. 그 쇼핑몰 안에는 세탁소가 있다. 정장을 수선하려고 들어간 세탁소에서 한국분을 만나게 되었다. 가끔 그분께도 큰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내가 뉴욕에 간다는 것을 알게 된 그분께서 자신의 조카가 뉴욕에 있다면서 나를 픽업해 줄 수 있다고 하셨다. 이번에도 떠나기 며칠 전 누군가의 도움이 나를 찾아왔다. 조카분이 근처 지하철역까지 오면 나를 픽업해 줄 수 있다고 하셔서 조카분의 전화번호만 가지고 버스에 올랐다.


뉴욕 맨해튼의 차이나타운에서 버스가 내렸다. 새벽 찬 공기를 맞으며 방금 나랑 같은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만이 도시의 도로위를 걸어서 어디론가 가는 모습들을 바라봤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고, 내가 끌고 가야 될 짐들을 바라보고. 근처 지하철역까지만 좀 힘들게 끌고 가면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이민 가방 두 개를 꽉 채우고 여행용 가방도 꽉 채워서 버스를 탄 게 오판이었다. 내 손은 두 개밖에 없는데 말이다.내린곳에서 몇 블락만 걸어가면 지하철역이 있어서 휴대폰 지도로 방향을 확인하면서 그 몇 블락만 고생하자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민 가방 두 개를 먼저 끌고 몇 발자국 간 다음에 놓고 저 뒤에 있는 여행용 가방을 다시 끌고 이민 가방 옆에 놓는 방식으로 그 몇 블락을 엄청 시간을 들여서 드디어 지하철역 앞까지 다다랐다.


"뉴욕 지하철의 첫인상"


정말 황당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만 보이지 한국에서처럼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봐도 이 지하철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말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 악명 높은 뉴욕 지하철과의 첫 만남이었다. 누군가 도와주겠지라고 생각하며 낑낑거리며 이민 가방 한 개를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계단 내려가시던 분이 가방들을 옮겨 주셨다.


도움을 받아 힘들게 짐들을 들고 긴 계단을 내려왔다. 지하철 티켓을 끊으려는데 또 황당한 일이 일어나 무척 당황했다. 지하철 티켓을 끊을 수 있는 기계가 고장 나 있던 것이었다. 대신에 지하철 입구 기계 앞에서 사람들한테 지하철 티켓을 현금을 받고 파는 불량스러운 일당이 있었다. 당연히 카드로 기계에서 살 계획을 하고 있었지, 사람한테 현금을 주고 지하철 티켓을 사리라고는 생각을 못 하던 나에게는 정말 청천벽력 같은 모습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얼마인지 물어봤는데, 몇 달러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구석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현금을 정말 탈탈 털어서 몇 원짜리 동전들과 1달러 지폐 하나가 있는 것을 찾아내서는 그 사람들에게 다시 가서 정말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면서 비굴하게 부탁했다.


“지금 가진 돈이 이거밖에 없는데, 깎아주시면 안 돼요?”


지금 이 지하철역에 들어가지 못하면 정말 내리기도 힘들었던 짐들을 다시 낑낑거리며 위로 올라간 다음에 다음 지하철역까지 걸어가야 하게 생겼으니 정말 방법이 없었다. 두 명의 패거리 중 흑인이 내가 양손에 내민 동전을 손가락으로 휘적거리더니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Nope”


좌절스러워서 한국어로 혼잣말을 했다.


“아, 어떡하지. 진짜 돈 없는데.”


그러자 그 패거리 중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한테 관심을 보이면서 한국말로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 순간 정말 구세주를 만났던 것 같았다.


“한국 사람이세요? 제가 지금 버지니아에서 오늘 아침에 버스를 타고 뉴욕에 왔거든요. 그래서 짐을 이렇게 많이 들고 이 역에서 지하철을 꼭 타야 되는데 기계가 고장 나서 티켓을 살 수가 없어요. 제가 카드밖에 안 들고 와서 현금은 진짜 이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정말 심각하게 고민을 하더니 저쪽으로 가서 흑인과 대화를 하면서 열심히 설득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나한테 와서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럼 특별히 지금 이 돈만 받을 테니까 가세요.”


“정말요? 정말 감사해요. 정말 고마워요.”


뉴욕에서 처음 만난 내 또래 한국분의 선처로 정말 싼 가격에 지하철 티켓을 받았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양손에 올리고 있던 동전 1센트까지도 박박 긁어가셨다. 낑낑거리며 지하철을 탔고, 약속했던 지하철역에 내려서 조카분을 처음으로 만났다. 뉴욕의 미리 알아봤던 집에 짐을 내려주고 근처 국밥집에서 아침으로 국밥을 사주셨다.


버지니아 첫 저녁밥이 불고기였는데, 뉴욕에서 첫 음식도 국밥이었다. 조카분의 도움으로 무사히 다시 집에 도착했다. 새로운 집주인 분께 인사를 드리고 2층으로 올라가서 내 방에 짐을 풀었다. 집주인과 방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한국 사람이었다. 하룻밤 만에 내 주변이 버지니아의 백인 사람들에서 뉴욕의 한국 사람들로 바뀌어 버렸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만남에 아직은 얼떨떨했다. 오늘은 화요일이고, 내일 수요일은 면접 날이었다.


"인터뷰"


수요일 로펌에 회의실에 들어가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40분가량 인터뷰를 보면서 수많은 질문을 하셨지만, 아직도 내가 기억하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어요?”


“저 버지니아에서 어제 아침에 이 오피스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걸리는 집으로 이사 왔어요.”


“우리 인터뷰 약속만 잡은 건데, 내가 만약에 뽑지 않으려면 어떡하려고 아예 이사를 왔어요?”


그렇다. 나는 대책 없이 면접만 잡은 회사 근처에 집을 구했다. 그분도 황당하셨는지 내가 이 질문에 답변한 다음에는 더 질문하지 않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셨다. 다른 지원자들 면접도 있으니 다음 주에 연락을 줄 테니까 기다리라는 약속을 받고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마침 뉴욕에 먼저 와 있던 Greg에게 연락해서 내일 당장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내 옆방에 사는 친구가 뉴욕을 소개해준다면서 기차를 타고 타임스퀘어에 데려가 주었다. 티비로만 보던 광경을 눈앞에서 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그날 저녁 타임스퀘어에 서서야 내가 정말 뉴욕이라는 도시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다음날 Greg이랑 맨해튼에서 만나서 한인타운에 가서 한국음식 사주고, 맨해튼 거리를 같이 구경하면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감사합니다. 혹시 지금 바로 오피스에 들러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를 원하시나요? 제가 지금 맨해튼에 친구랑 나와 있는데, 친구랑 지금 헤어지고 바로 로펌으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사람들이 빽빽하게 돌아다니는 그 길거리 한복판에서 “나 취직했어!”라고 크게 외치면서 Greg이랑 하이파이브하고 방방 뜨고 난리를 쳤다.


“Greg진짜 미안한데, 우리 다음에 다시 만나자. 방금 전화 왔는데, 지금 바로 오피스로 와서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고 하시네.”


그렇게 맨해튼 거리 한복판에 Greg 두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뉴욕 변호사"


입사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뉴욕주 법률 시험을 쳤다. 오픈북 테스트로 2시간 동안 뉴욕주 법률 시험을 쳤고, 드디어 모든 시험이 끝났다. 뉴욕주 법률 시험을 통과했고, MPRE 성적도 통과했으니 이제 남은 시험은 바 시험이었다.


10월의 넷째 주 월요일 저녁. 무슨 일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회사 일이 끝나고 맨해튼에 나갔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녁 11시가 다 된 시간이어서 내가 탔던 칸에는 사람이 듬성듬성 앉아있었다. 휴대폰에 이메일 알림음이 떴고, 제목을 읽어버렸다.


“July 2017 New York Bar Exam Results”


제목을 읽는 순간 심장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에세이 한 개를 잘 못 썼던 게 다시 상기되면서 떨어졌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이메일에 첨부된 편지를 열어보았다. 영어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대충 훑으면서 내 점수를 확인하는데 분명 뉴욕주의 점수 커트라인인 266점을 넘는 점수였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바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점점 현실로 느껴지면서 바보같이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웃으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니까 정면에 앉은 사람, 대각선에 앉은 사람, 서 있는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 잘못 된 건 하나도 없어요. 제가 이메일을 받았는데, 바 시험을 통과했대요. 기뻐서 그래요.”


주책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축하한다는 말들을 듣고도 아직 내릴 정거장이 한참 남아서 민망하지만 계속 앉아있었다.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 중의 한 장면이었다.


바 시험은 합격했지만, 정식으로 변호사 선서를 하기 위해서는 서류 제출이라는 큰 관문이 남아있었다.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추천서가 필요했고, 법조계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면 상사들로부터 확인서를 일일이 받아서 제출해야 했다. 서류 정리에 시간이 조금 걸렸고, 서류를 제출했지만, 다시 인터뷰를 해야 했다. 인터뷰 약속이 잡히는 것도 한 달이 걸렸고, 인터뷰가 끝나고 선서 일정이 잡히는 것도 한 달이 걸렸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드디어 뉴욕주 법원에 가서 선서를 하고, 변호사들 이름과 사인을 적는 정말 큰 책에 내 이름과 사인을 남겼다.


나는 뉴욕주 변호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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