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 시험이 끝이 아니었다. MPRE (Multistate Professional Responsibility Examination) 시험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바 시험에 합격해도 정식으로 뉴욕주에서 변호사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더 거쳐야 할 단계들이 남아있었다. MPRE이라는 윤리시험도 그중에 하나였다. 윤리시험인 만큼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보통은 2L 때 방학이나 학기 중에 2~3주 정도만 열심히 공부해서 치는 시험이다. 그렇지만 로스쿨 첫해 때는 어렴풋이 바 시험 준비를 하려면 바 패키지를 들어야 한다는 것만 알았지 MPRE에 대해서는 몰랐고, 이야기해주는 친구도 없었다.
여름 인턴십을 끝내고 두 번째 해 가을 학기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바 시험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MPRE 시험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얻게 되었다. 친구들이 쉬운 시험이라고 해서 가을학기 때 보려고 시험을 등록하려다가 아무래도 학기 중이고 수업도 많이 듣고 할 일이 많아서 그냥 마음 편하게 바 시험 2주 뒤에 시험을 쳐야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으로 8월 초에 있는 MPRE 시험에 등록했다. 다행히 우리 학교가 시험장 중의 한 곳이라 우리 학교에서 시험보기로 선택해서 시험 보러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 걱정은 덜었다. MPRE는어차피 바 시험 치고 2주 뒤에 있는 시험이니까 바 시험 끝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쳐야겠다는 멋모르는 말을 내뱉고 다녔다. 바 시험을 치루고 다음날 저녁에 리치먼드에 돌아왔다.
"누굴 탓하겠니. 내가 한 선택인데"
돌아오고 나니까 수능보다 더 큰 시험을 끝낸 직후여서 휴식이 필요했다. 이미 Barbri와 Kaplan에서 MPRE대비 공부할 문제집을 무료로 나눠줘서 책은 갖고 있었고, Barbri에서 무료로 강의도 들을 수 있어서 공부할 자료는 충분했다. 믿을 구석이 있어서 그런가 조금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바 시험을 디데이로 잡고 공부를 해서 그런지 몸도 나른해졌다. 바 시험까지 끝났는데 바로 다른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정신적으로 정말 힘들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때 이제 3L이 될 내 동기들한테 아주 피가 되고 살이 될 명언을 남겼다.
MPRE는 꼭 방학 때 쳐. 바 시험 끝나고 치면 정말 지옥이다. by Heather
그래도 바 시험을 끝낸 주에는 휴식을 취하는 게 맞다 싶어서 주말까지 놀았다. 다음주 월요일, 시험을 십여일 앞두고 다시 학교 도서관에 가서 내 carrel에 고이 잠들어 있던 MPRE문제집들을 꺼냈다. 학교에 간 김에 입학 관리 학장님께 기숙사 문제를 의논하려고 Admissions Dean’s office에 갔더니 데스크에 계신 분들이 나를 보자마자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셨다.
“바 시험 어땠어?”
“잘 못 봤어요. 떨어질 것 같아요.”
나는 진짜 에세이 한 개를 망쳤다고 생각해서 진실되게 대답했다. 그 분은 내 말을 듣더니, 깔깔깔 웃으시면서 명언을 해주셨다.
내가 여태까지 정말 숱한 학생들을 봤거든. 바 시험 그거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거들먹거리는 애들은 떨어졌고, 바 시험 어려웠다면서 떨어질 것 같다고 했던 애들은 다 붙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넌 잘했을 거야.
그 한마디가 바 시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림의 3개월을 버티게 해 줬다. 희망의 격려였다. 내 carrel로 돌아가서 다시 문제집을 펴고,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인고의 십여일을 보냈다.
"정확했던 친구들의 예언들"
MPRE는 두 시간 동안 객관식 60문제를 푸는 시험이라 나는 객관식이라는 이유로 가볍게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공부에 돌입하면서 MPRE를 둘러싼 친구들의 각종 루머가 어느새 피부에 와 닿았다.
“MPRE를 문제를 풀 때 네가 일반적인 윤리 상식에서 옳은 답이 보여서 그 답을 찍으면, 그 답은 틀린 답이야.”
“MPRE는 더 오래 공부할수록 더 많이 헷갈린다. 적당히만 공부하고 시험 쳐야 돼.”
“MPRE의 진짜 답은 네가 답이 아닌 것 같아서 제한 게 답이다.”
“MPRE는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보다는 감정 없는 냉혈한이 오히려 답을 더 잘 맞힐걸.”
연습문제 답을 확인하면서 그때는 웃어넘겼던 말들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들의 정확한 예언에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윤리시험이라 맞는 말만 고르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은 버려야 했다. 이 윤리 시험의 문제들은 고객의 의뢰를 받은 변호사, 회사에 소속된 변호사, 전 회사의 사건과 관련된 변호사 등 상당히 다양한 주제로 변호사로 일하면서 곤경에 처하지 않기 위한 법규에 따른 행동을 답으로 골라야 했다. 일반적인 윤리하고 거리가 먼, 직업윤리였다.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하고 일반인이 보기에 정답 같아 보이는 선택지는 항상 오답이고, 공부하는 날이 하루하루 더해갈수록 처음에 쉽게 풀었던 문제도 다시 보면 오답들이 그럴듯하게 보이는 매혹적인 시험이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미로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참 재미있는 시험공부였다. 바 시험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2주 동안 시험대비를 열심히 했고 드디어 대망의 토요일, 시험날이 되었다.
"극한시험"
시험날도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시험 문제를 푼 지 한 10분 정도 지났나 갑자기 익숙한 느낌으로 콧속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느낌이 났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몸이 약해서 매일 코피가 났던 터라 코피가 흘러나오는 느낌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큰일 났다.’
바로 고개를 치켜들면서 휴지가 있나 머리를 굴렸지만, 나한테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하게 왼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오른손으로 문제를 계속 풀어나갔다. 이상한 포즈를 하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나를 보면서 시험 감독관이 나한테 괜찮냐고 손짓으로 물어봤다. 뭐 시험 중단하고 밖에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시간도 아까워서 그냥 괜찮다고 손짓을 하고는 다시 시험을 치기 시작했다. 두 시간 가까이 문제를 푸는데, 불편한 자세와 코피가 신경 쓰여서 이게 문제를 제대로 푸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정신으로 그냥 막 문제를 풀어버렸다. 시험을 보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서 이 정도면 멈추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 휴지도 없는데 함부로 손가락을 뗐다가 코피가 주르륵 흘러서 시험지나 옷에 묻으면 더 큰 일이니까 시험 끝날 때까지 계속 막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나와서 화장실로 바로 들어갔다. 다행히 두 시간 동안 코를 막고 있어서 코피는 멈춘 상태였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고 헛웃음이 나왔다. 몇 주 뒤에 결과를 받았다. 주마다 MPRE 합격 점수가 다른데, 뉴욕의 점수는 150점 만점에 85점이었다. 시험을 어떻게 봤든 어쨌거나 MPRE 커트라인 점수는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