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너의 생일
얼마 전 꼬박 이틀을 아팠다. 나는 제법 건강체질이라 쉽게 아프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어릴 때도 내가 어쩌다가 감기에 걸리면 엄마가 잘해줬었다. 알러지 비염으로 늘 감기를 끼고 살았던 오빠와 달리 나는 1년에 한 번 아플까 말까 했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를 반복하며 여기저기 고장 나고 삐그덕 거리는 곳이 늘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건강하고 회복도 빠른 편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보통 컨디션이 좀 별로여도 하루만 쉬고 나면 그럭저럭 회복되어 일상생활이 가능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어려웠다. 설사로 시작되더니 오한과 식은땀이 반복될 때는 이거 설마? 실제로 오미크론 증상과 흡사해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하나 싶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확히 이틀 지나니 거짓말처럼 증상이 완화되어 경미한 장염이 아니었나 추측만 하고 있다.
아프고 일어나니 집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빨래통에는 빨래가 잔뜩 쌓여있고 여러 가지 물건들이 제 자리를 벗어나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고 개지 못한 빨래가 소파 구석에 구겨져 있고 화장실에서도 냄새가 풀풀 나기 시작하는데 이제야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며 한숨이 절로 났다. '아이고 내가 아프니 집안꼴이 말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칠 때 '아? 하지만 누군가 내 대신 밥을 해야 했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고양이들을 케어했구나?' 작은 구멍들은 났을지 모르지만 우렁각시가 다녀간 듯 완벽하진 못해도 그럭저럭 다들 내 자리를 메꿔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이 다 그렇다. 내가 없으면 당장 무슨 큰 난리가 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국가원수가 사라진다고 그 나라가 망하지 않듯이 세상은 그렇게 다 돌아가게 되어있다. 모든 것이 그랬다. "너 없으면 나는 못 살 것 같아"라고 고백했던 뜨겁던 사랑도, 부모도, 은인도, 친구도 내 인생에서 그들의 공백이 생기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뒤로 나자빠졌지만 결국 어떻게든 살아냈다. 가난도 이별도 육체적 고통도 그 어떤 것도 나를 세상 끝으로 내몰진 못했다. 오직 단 하나, 내 아들의 죽음을 빼고 말이다.
아주 예전에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라는 책을 읽었다. 죽음을 앞둔 주인공 열여덟 초희보다도 훨씬 어렸던 나는 그녀가 안쓰러워 눈시울을 붉히며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난다. 가끔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너무 빨리 하늘로 떠난 우리 아들이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스무 살을 넘기면 서른, 마흔, 그리고 쉰…… 결국 백 살까지 장수했으면 하고 욕심냈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내가 조금만 더 보살펴 줬더라면……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올해도 아들의 생일은 어김없이 돌아왔고 아들이 열다섯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한 에미는 아직도 가슴이 찢어지고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린다.
얼마 전 어떤 분이 내게 연락을 주셨다. 한 달 전 갑작스레 어린 아들을 잃은 어머니로 재작년 너무도 허망하게 아들을 떠나보낸 나처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내게 연락을 주신 것이다. 그녀가 물었다. 기다리면 조금은 괜찮아지느냐고…… 언제쯤이면 하루라도 눈물 흘리지 않는 날이 오냐고…… 아들을 잃은 그해에 내가 누군가에게 던졌던 질문과 똑같아서 너무 놀랐다. 어떻게 살지? 세상에 내 아들이 없는데…… 내 금쪽같은 아들이 나를 떠났는데 대체 어떻게 남은 생을 멀쩡히 살 수 있지? 나 또한 그렇게 물으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고작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글쎄요…… 제게도 눈물 흘리지 않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네요. 앞으로도 눈물 없이 살 순 없겠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열심히 살 수밖에 없어요. 아들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가려면 나는 잘 살아야만 해서요." 이게 전부다.
하늘로 떠난 아들의 열다섯 생일을 맞아 올해는 가족사진을 찍기로 했다. 여행, 명절, 생일 때마다 즐겨 찍던 가족사진이지만 스튜디오에서 다 함께 찍는 사진은 처음이다. 아들의 빈자리를 보며 또 한 번 가슴 아프겠지만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선물 같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 귀한 아들아, 엄마는 열다섯이 되었을 네가 사무치게 보고 싶구나. 비록 함께할 수 없는 너의 생일이지만 엄마는 백 번 천 번 네 이름을 불러본다.
열다섯 생일을 축하하며……
I love you and I miss you endless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