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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진 Oct 10. 2020

전혀 다른 두 종족이 만나 한 집에 산다는 것

이해가 안 되면 그저 존중해 보자.


여남을 떠나서 전혀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나 한 집에 살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 결혼이다. 흔히  남편은 어떻다, 아내는 어떻다 이런 이야기는 그저 일반론일 뿐이다. 성별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가정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자라왔기에 부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아내와 나는 큰 지향점은 같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길이 너무나도 다르다. 나는 가는 길마다 이정표를 계속 확인하고 걷는 걸음걸이마다 하나하나 확인하며 나아가는 반면, 아내는 큰 방향만 맞으면 조금 위치가 벗어나 있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큰 발걸음으로 나아간다. 중간중간 사소한 것들도 예민하게 따지는 나와는 달리 아내는 대세에 지장 없다면 사소한 것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생활 속 작은 일들을 대하는 자세 역시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다. 각종 고지서가 날아오면 나는 날아온 당일에 처리한다. 반대로 아내는 기한의 마지막 날이 돼서야 처리한다. 청소 스타일도 다르다. 나는 그때그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치워야 직성이 풀리지만 아내는 날을 잡아 대청소를 하는 성격이다. 육아도 그렇다. 아내는 야생에 풀어놓는 방식인 반면 나는 한없이 딸을 감싸고돈다.




다들 그렇듯 우리 부부 역시 한 집에서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사소한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삶의 공식과 문법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기 때문에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틀린 행동을 자꾸 할까 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 있으니 결혼 초기 '냄비 대첩', '설거지 전투' 따위로 명명된 수많은 혈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로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주는 여러 전투들을 치른 후에야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왔다. 아내로부터 이 말을 들었던 순간이 바로 그 깨달음의 시작이었다.


"아니 왜? 그렇게 다 마음에 안 들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고치라 그러지 그래?"

이 말을 들은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다 맞는데 아내는 왜 저렇게 반응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 후배와의 예전 대화가 떠올랐다.


 그 후배가 결혼식에 와줬다고 감사의 인사를 하는 자리였다. 신혼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남편이 너무 이상하다며 우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남편이 늘 잘못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한참 듣고 있던 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래? 남편도 자신만의 방식이 있는 거 아니야? 그러는 너는 어때? 네가 잘못하는 건 없었어?"

내 질문에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그 후배는 내게 이런 대답을 내놓았고, 나는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나? 음... 글쎄... 나는 잘못하는 게 없는데..."


 말도 안 되는 답변을 내놓으니 그 어이없음에 나는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후배는 내가 왜 웃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진심으로 자신만이 옳다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남편은 무조건 틀렸고 오로지 나만이 맞다는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내의 한 마디에 연쇄적으로 그 대화가 떠오른 뒤, 그때 그 후배의 모습과 내가 같아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겨우 찾아온 후에야 아내와 나는 조금씩 제대로 된 동거, 제대로 함께 사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 자신의 습성대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완벽히 누가 맞다, 틀리다 하는 객관화된 사실이 존재할까. 그저 내가 해왔고 내 부모님이 해온 걸 봤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게 아닐까. 다른 집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아내 혹은 남편은 당연히 자신의 방식이 진리가 아닐까.


'서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바로 '존중하는 것'이었다.


이해가 안 되면 존중하면 된다. 매일매일 함께 살며 하는 일들 중 대부분이 이해가 잘 안 되는 일들이다. 아예 종족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람들은 존재할 수 있겠지만 완벽하게 똑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 인구로 따지면 5000만 명, 5000만 종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별처럼 반반으로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종족이 전혀 다른데 다른 종족의 삶을 어떻게 완벽히 이해하겠는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 노력해도 완전한 이해가 이루어지는 않을 텐데 굳이 이해하려 들 필요 없다.


 그저 존중해보는 것이다. 내 아내를, 내 남편의 방식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 편해진다. 꼭 내 방식이 옳다는 생각을 계속 갖고 있어도 저 방식을 존중만 하면 피곤할 일이 조금 사라진다. 물론 말이 쉽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조금 나아졌을 뿐 아직도 많이 헤매고 있다. 결혼 6년 차를 넘겼는데도 말이다.


둘이 모여 가정을 이룬다는 건 그 무엇보다 치열한 삶이다. 거기에 더해 이제 발언권이 꽤나 세진 네 살배기 딸내미까지 포함하면 세 종족이 가정을 이루게 됐으니 평온한 날만 이어진다면 정상이 아닐 것이다. 영혼이나 주관이 없는 사람들만 모여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두 종족, 이제는 세 종족이 이루는 가정은 그 어떤 가치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그것으로 살아가는 힘을 얻으니까. 다치고 나서 회복하면 자라고, 깨지면 다시 붙이고 하면서 성장하게 되니까. 인생의 그 어느 시점보다 가장 풍성하고 사건사고가 많은 시기이고, 이것을 또 뛰어넘으면 또 새로운 인생의 맛을 알 수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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