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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진 May 08. 2020

아버지가 점찍어 둔 아나운서가 우리 집 며느리가 됐다.

운명이라는 게 정말 있을까


아침 신문을 보시던 아버지가 불쑥 말씀하셨다.


“어제 광화문에서 사회 보던데? 재밌더라. 한참 보다 왔어. 허허허”


“아니 아빠 언제 오셨어요. 오셨으면 오셨다 연락을 하셔야죠.”


“집에서 매일 보는데 뭘. 행사 보고 엄마랑 국수 한 그릇 먹고 놀다 왔어. 그런데 같이 진행한 그 여자 아나운서는 누구니? 아빠는 좋더라. 그런 처자 데리고 오면 참 좋겠다. 허허허.”


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부모님께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말하기에 이 만한 타이밍이 없었다.


“아. 아빠, 그 친구 TBS 아나운서예요. 사실 저희 사귄 지 좀 됐어요. 슬슬 결혼 이야기도 하고 있어요.”


처음엔 그저 놀라는 표정이었던 아버지의 얼굴이 이내 기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래? 허허허. 거참 신기하네. 우리 가족과 인연인가 보다. 어제 그 친구 보면서 그런 생각했거든, ‘마음에 쏙 드네, 나진이가 저런 아가씨 데려왔으면 좋겠다.’ 하고 말이야. 허허허. 잘됐다 잘됐어! 허허허.”  

 



 교제를 시작하고 석 달 만에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26살이었던 여자 친구는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계속되는 결혼 이야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거듭되는 나의 결혼 공세에 여자 친구는 결국 무너졌고, 우리는 결국 결혼을 향해 달려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누군가를 보고 며느리 삼고 싶다고 말씀을 하신 건 처음이었다. 함께 일하는 많은 여자 아나운서들을 몇 년 동안 지켜보면서도 단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에 적잖이 놀랐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걸까. 아버지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을 보고 왜 그런 생각이 드신 것일까.


 아버지가 광화문에서 우리를 목격한 그날은 우리가 사귄 이후 처음으로 함께 행사 진행을 한 날이었다. 같은 아나운서지만 회사가 다르기 때문에 같이 일할 일이 없는 우리에게 그날은 특별했다. 2MC로 행사 사회를 함께 본 것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특별함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기에 일을 하면서도 참 행복했다.


  우리에게도 특별했던 그 날이 아버지의 특별한 순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특별한 날까지 연결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막연히 가지고 있던 생각, ‘아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라는 생각 또한 아버지의 이야기와 맞물리며 증폭돼 100% 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되돌아보니 나는 운명이란 걸 믿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결혼을 앞둔 커플들에게 흔히 이런 질문을 한다.

“언제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나 역시 이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나와 여자 친구는 계속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가 서로 알지도 못하던 수년 전에 내가 있던 곳에 여자 친구가 왔다 갔고, 여자 친구가 있던 곳에 내가 수시로 들락거렸고 말이야. 그리고 왜인지는 몰라도 우리 가족과도 강하게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꾸준하게 들었거든.”


 뱀파이어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보면 ‘각인’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큰, 한 사람이 어떤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상대가 되는, ‘첫눈에 반한다.’ 보다 더 큰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그야말로 꽂힌다는 개념인데, 아마 그런 것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힘이 너무 강렬해 아버지까지 전달된 것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번 해본다.


우리 부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진행했던 운명의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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