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진 May 20. 2020

아내가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20학번 신입생이 된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그 말, “오빠, 나 할 말 있어.”


2019년 10월 24일 목요일 저녁


아내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딸내미와 함께 먹는 밥은 무슨 반찬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전쟁이기에 말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듯 보였다. 안 먹는다고 온갖 생떼를 부리는 딸내미 밥을 억지로 먹이고 나서 아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 잠깐의 여유를 느끼며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아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빠, 나 할 말 있어.”


남편들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그 말이 던져졌다.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이 말이 왜 이리 무서운 건지 모르겠다. 평소 자주 듣는 말인데도 이 말이 떨어지고 본론이 나오기까지의 짧은 시간이 억 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사실 나.......”

“응. 여보.”


평소 안 하던 뜸 들이기를 하니 더 무서웠다. 그 짧은 순간 최근 내 생활을 돌이켜봤다. 특별히 잘못한 건 없었다. 오히려 휴직 중인 아내가 의기소침할까 봐 매번 용기를 불어넣어주려 노력했던 나였다. 잘못한 게 없다는 확신이 들자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그러자 아내도 말했다.


“나 학교에 가고 싶어. 그래서 지난 주말 면접 보러 나갔다 온 거야.”

“합격하면 말하고 싶었는데, 오빠가 너무 놀랄까 봐....... 사실 내일이 최종 발표 날이야.”


다음날 야구 중계 중 받은 아내의 합격 소식




2019년 7월 13일 토요일 낮


 아내가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작년 초 아내는 TBS TV 책 프로그램 <북소리> MC를 맡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매일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일주일에 한 번 방송되던 <북소리>는 장강명, 정유정 작가 등 인기 작가들과 함께 나누는 북 토크가 주된 내용이었고, 아내는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많은 걸 느낀 듯했다.


 4박 6일 동안의 짧은 미국 출장을 다녀온 다음날이었다. 시차 때문에 늦은 오후까지 누워있던 내게 아내는 다시 그 무서운 한마디를 꺼냈다.


“오빠, 나 할 말 있어.”


역시나 무서운 그 말 뒤에 이어진 한 마디,


“오빠, 나 회사 그만두려고.......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보고 싶어.”


 사실 아내의 퇴사 선언은 처음이 아니었다. 입사한 후 줄곧 몇 차례 꾸준히 들어왔기에 익숙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경제적 여건 상 아내가 직장에 잘 다니길 내심 바랬다. 물론 아내 앞에서 그냥 회사 잘 다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퇴사하고 싶다는 말을 할 때마다 우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다독거려준 다음, 며칠 시간이 지나 안정이 되는 그때, 회사를 그만두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말하는 전략을 썼다. 그리고 그 전략은 한동안 잘 먹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말 그만두는 거니?


2019년 8월 10일 토요일 아침


 새벽 3시쯤 아내가 도어록을 여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송별회를 하고 온다던 아내는 어느새 들어와 안방 한쪽 구석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자는 내내 돌아다녀 내 발 밑에 와있는 딸아이를 제자리에 눕히고 나서 거실로 나갔다. <북소리> 마지막 방송을 하고 받은 것으로 보이는 꽃다발이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 우유를 마시려 냉장고를 여니 케이크도 하나 들어있었다. 베란다에는 ‘꽃보다 혜지’라고 적혀있는 작은 화분도 놓여있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아내가 진짜 회사를 그만두는구나. 아나운서 일을 하지 않는구나. 더 이상 마이크를 잡지 않는구나.’


아내의 마지막 인사?


2019년 9월의 어느 날


 회사는 고맙게도 아내를 계속 붙잡아주었다. 바로 퇴사하지 말고 휴직을 하면서 시간을 가져보라 했다. 계속되는 선배들의 설득이 이어졌고 아내는 무너졌다. 무조건 바로 퇴직 발령을 내달라던 굳은 의지는 차츰 누그러졌고 선배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선 휴직 발령을 냈다.

 휴직을 하는 동안 아내는 한겨레 문화센터에 등록을 해 글쓰기를 이어갔다. 그 열망은 더 커지는 듯했고 새로운 꿈에 걸맞은 노력을 이어갔다. 딸내미 방 겸 서재로 쓰이는 작은 방의 스탠드 불빛은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도 계속 켜져 있었다.

 아내의 열정적인 모습을 지켜보던 나도 결국 마음을 접게 됐다. 아내가 회사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아주 작은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게 됐고 100%의 마음으로 아내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 던지고 대학원생도 아닌 20학번 신입생이 된다는데 왜 반대하지 않았냐는 아내의 질문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나 아나운서 하고 싶다고 전에 다니던 회사 그만뒀잖아. 근데 그때 진짜 좋았거든. 꿈은 둘째 치고, 일단 회사 때려치우는 행위 자체가 인생에서 한번 올까 말까 한 짜릿한 순간인데, 그거 한번 못해보고 계속 살기엔 억울하잖아. 여보도 그 감정 한번 느껴보라고. 헤헤헤.”


“그리고 여보, 베스트셀러 작가 되면 나 차 바꿔줄 거지? 격하게 응원한다. 사랑한다. 헤헤헤”



비슷한 나날이 이어지던 중 2020년 1월의 어느 늦은 밤


 요 며칠 아내가 뭔가 이상했다. 잘하지 않던 밤늦은 통화도 자주 하고, 예정에도 없던 외출을 한다며 갑작스레 나가기도 했다. 뭔가 있구나 지레짐작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그날 밤 딸내미를 재우기 무섭게 그 말이 훅 들어왔다.


“오빠, 나 할 말 있어.”


이번엔 과연 무얼까, 또 무서운 생각이 나를 엄습했다. 그리고 들려온 한마디.


“오빠 나 학교 가는 거 응원해줘서 고마웠어. 그런데 나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고.......”


아내가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이유 중 가장 큰 건 선후배들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만둔다는 사람을 그 누가 몇 개월에 걸쳐 휴직까지 쓰게 해 주며 붙잡아 줄까.


“사실 요 며칠 계속 선배들 만났어. S팀장님은 눈물까지 보이시고, N선배는 본인 위치도 있는데 회사 눈치도 안 보고 끝까지 한 번 더 잡아주시고, L후배는 아직도 계속 만류하고.......”


“그렇다고 꿈을 포기하는 건 아니야. 방송도 열심히 하고, 글도 더 열심히 쓸게.”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20년 5월 20일 수요일 오늘


 결국 아내의 대학생 선언은 몇 달 간의 작지만 큰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런데 오히려 아내 덕분에 내가 글을 쓰게 됐다. 글쓰기에 매진하는 아내를 보며 그동안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내 생각, 내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뜻을 더 굳힐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글을 더 발전시켜나갔다.

 그렇게 몇 달 동안 나는 아내와 함께 글을 쓰며 투고를 이어갔고, 몇 번의 실패 끝에 한 출판사가 내 글을 알아봐 주었다. 그렇게 나는 아내 덕분에, 초짜 작가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물론 아내도 회사를 전보다 더 열심히 다니며 꿈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는 크나큰 영향력을 확인하면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아내는 내게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오빠 글 쓰는 거 내 덕분인 거 알지? 나한테 오는 기운을 다 오빠한테 넘겨준 거라고. 알지?”


어느덧 세뇌된 나는 진심으로 대답한다.


“당연하지, 다 여보 덕분이야. 역시 여보가 최고야!”


그리고 아내는 재차 확인한다.


“오빠! 오빠 베스트셀러 작가 되면 나 차 바꿔줄 거지?”

이전 06화 아내의 항의를 받고 글을 내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