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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단테 Jan 08. 2023

심리게임

알코올 중독자의 여덟번째 만남

inside out



감정은 터무니없을 때가 많다. ‘사실’ 그 자체는 요맨큼-요만큼이 맞는 맞춤법이지만 더 적어 보이게 표현해 본다-인데 그것에 반응하는 나의 감정은 ‘이따 만큼’이다. 그래서 골치 아픈 대화가 아니었음에도 우리는 유치해지고 그 유치함을 이유로 좌절하거나 비겁 해진다. 우리가 비겁해서 유치한 것은 아니다. 사실을 왜곡하는 이 감정이 자꾸 우리를 비겁하고 유치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감정을 저 멀리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쯤 깨닫게 된다. 나의 모든 행동이 합리화되었던 이유는 저 감정이라는 녀석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ㅈ”은 남자 친구들 중에서도 섬세한 성격을 가진 친구다. 갑자기 일을 쉬게 되면서 가족들에게 걱정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로 선물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민하던 와중 때마침 어떤 상품을 상담사에게 상담받게 되었다. 상담사에게 친절히 상담받은 "ㅈ"은 가족들이 기존에 사용하던 상품보다 상담받은 상품이 좋다고 판단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ㅈ"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그 상품을 권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셨다고 한다.


“필요 없으니 놔두거라”


예상하지 못한 한마디에 말문이 막혀 대화가 끊어지게 되었다. “ㅈ”의 섬세한 성격은 그 한마디로 많은 상상을 시작하게 된다. 그 상상의 시작은 ‘나를 못 믿으시나?'로 시작하여 뒤로 가서는 '나는 이 세상 필요 없는 존재인가?'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우울감이 “ㅈ”을 지배하고 갑자기 찾아온 우울감으로 자신의 감정이 조율되지 못하였다. 사실 문제의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첫째,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시작하거나 둘째, 아버지의 선택을 그냥 존중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섬세한 ”ㅈ“은 그 두 가지를 시작도 하지 못하고 우울감에 빠졌다. 왜?


세상 모든 일은 결국 자기와의 심리게임이다. 다스리고 조율하고 달래주며 마음의 컨트롤을 해야 한다. 그런데 너무 나 자신을 거울 보듯 바라보고 있으면 컨트롤이 매우 힘들어 진다. 픽사에서 제작한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을 지배하는 5개의 감정이 주인공을 로봇처럼 조정하면서 성장시키는 영화이다. 영화에서 처럼 나 자신을 객관화된 사물로 인식하고 서로 다른 감정들이 조정하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바라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객관화된 모습으로 스스로를 통제하는 방법은 우리가 자주 하는 온라인 게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내 케릭터의 스펙을 직접 세팅하고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플레이를 하며 재미를 느끼는 온라인 게임. 그 거대한 게임 세상에서도 각자가 자신의 캐릭터를 플레이하고 있다. 게임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습성조차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면 모든 대화의 표적이 나를 통과하게 된다. 그리하여 작은 상품에 대한 선택이 나의 존재 유무를 가릴 수 없음에도 내가 받은 상대방의 말은 상처가 되어버린다. 물론, 가족 간의 말 못 하는 역사에 대해 파악하지 않고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가족과의 대화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 자주 등장할 때가 많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이런 일은 더더욱 자주 일어난다. 감정의 지배가 심한 경우, 내 몸에 다른 인격체를 소환하고 그 인격체는 평소와 다른 나의 행동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이는 그것을 폭력으로 표현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음주운전으로 표현하며 어떤 이는 그것을 자해로 표현한다. 나 같은 경우 치료를 받으면서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바로 나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방법이었다. 우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맞지만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했다. 모든 말이 나를 통과하고 나를 괴롭히고 나를 위한다는 생각을 버리기 시작했다. 다행인 건 술을 끊으면서 상대방의 말들이 잘 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앞서서 상대방의 말을 예상해 말을 끊고 내 입술이 먼저 움직이는 일이 없어졌다. 취해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상대방을 바라보고 깊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런 점은 내가 술을 끊으면서 얻은 최고의 장점이기도 하다. 심지어 나는 이제 누군가의 대화가 즐겁기도 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합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금주를 하고 있음에도 감정은 나를 맥 빠지게 우울하게 만들기도 하고 뛰어보고 싶게 만들기도 했다. 이럴 때 가끔은 스스로를 개구리에 비유해 본다. 아무런 움직임도 감정도 없는 맥없는 하루를 보내다가 내가 생각하지 못한 크기로 크게 한 번씩 뛰어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스스로 물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한 번이라도 폴짝 뛸 때 신나게 뛸 수 있다면 행복한 것은 아닐까 하고 작은 합리화도 해본다.


"ㅈ"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후에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나서서 오해를 풀어줬다고 한다. "ㅈ"의 아버지는 예전에 상담을 통해 물건을 사기당한 적이 있어 다시는 상담을 통한 구매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계가 다르면 언어도 다르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 봐왔지만 그만큼 서로를 너무 쉽게 판단하고 배려하지 못해서 생긴 해프닝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영화를 본 이후에 나는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아직 나에 대해서 자유로워지진 못했다. 아직도 "ㅈ"과 같은 상황들을 반복하고 상처받고 슬퍼할 때가 종종 생긴다. 안다고 해서 완벽한 것이 아니다. 앎으로 해서 나를 객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이후 발전의 방향과 달리는 방향은 각자의 힘으로 진행된다. 당신의 방향은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디로 뛰던 나는 당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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