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자의 아홉 번째 만남
"내 눈에 파란색이 혹시 저 사람 눈에는 노란색으로 보이지 않을까?"
아주 어렸을 때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며 터무니없는 상상이 바로 색에 대한 상상이었다. 내 눈에 파란색인 저 색은 누군가에게는 노란색이거나 빨간색은 아닐까? 색은 절대적이지만 우리들의 눈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각자 인식하는 색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모두가 바라보는 세상의 색이 다르기에 모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이상한 확신을 갖었다.
물론, 이 생각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가 아닌 나만의 상상으로 시작되는 것이라 지금에 이르러 결론은 '그럴 리 없지'로 끝났지만 이상하게 요즘에도 가끔 생각하게 된다. 최근에는 더욱 이런 생각을 수십 번 해오면서 왜 한 번도 이야기로 꺼내보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일지라도 다양한 수다거리로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스스로 누군가에게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못 배운 바보'라고 보일까 두려워 꺼내지 못했던 것 같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중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행위는 바로 글쓰기였다.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정리하여 글로 풀어내기 시작하면 무언가 외로움이 해결되고 답답했던 현실이 조금은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전이고 글재주는 더욱 처참했던 시기.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일어나 무얼 해볼까 고민하던 어느 날. 조건 없이 SNS에 손 편지를 주고받을 분들을 구했다. 몇 분이 되었던 모두 써드리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작했던 일인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신청해 주셔서 매일 아침 출근하면 하는 일이 손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열 분이 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는 뜻밖에 많은 수였다.) 편지지는 모두 무인양품에서 구매한 같은 편지지였지만 글의 내용은 절대로 같지 않았다. 물론, 편지의 내용은 "우리 모두 힘내요"라는 결론으로 가는 내용이었지만 말이다. 답장을 기대하고 보낸 편지는 아니었지만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조금은 삶에 힘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에 편지를 보내고 뿌듯하고 기뻤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편지 받기를 먼저 원하시고 열정적으로 기대하셨던 분이 편지를 받고 답장을 꼭 남기시겠다는 말과 함께 SNS 팔로잉을 취소하셨다. 그 뒤로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분에게 어떤 불편함을 제공하는 글을 쓰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너무 악필이라서 놀라셨을까? 분명 그 어떤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노력했을 텐데 어떤 불편함이 그분을 자극했을까? 내가 본인이 생각했던 성별이 아니라서 그랬을까? 생각은 꼬리를 물었지만 현실은 물어볼 수 없으니 알 수 없었다. 최근 내가 겪은 이별들은 모두 정확한 이유가 없었기에... 마음은 조금 아팠고 궁금증만 크게 남았다.
어떤 작가의 글을 읽고 누군가는 많은 공감을 갖지만 어떤 이는 혐오하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인간은 다 개인 고유의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의 글이지만 각자 해석이 다른 것 일지도 모른다. 앞서 터무니없는 색담론처럼 글 역시 사람마다 읽고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기에 어쩌면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벽 너머를 궁금해하는 것일지도.
미술을 전공하고 싶지만 사정상 배우지 못했던 나는 약 한 달간 미술학원을 다녔던 적이 있다.
취미반이라서 한쪽 구석에서 입시반 아이들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앉아서 터무니없는 걸 그릴 수 있는 학원이었다. 어느 날 입시반의 "ㅂ"이 하늘을 그리고 있었는데 노을로 보여야 하는 부분에 핑크색이나 붉은 계열의 색이 아닌 전혀 다른 색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것이 어떤 예술적인 멋짐이라 생각하고 감탄하고 있었다. 그때 다른 입시반 친구가 "ㅂ"에게 오더니 크게 놀라며 물감위치 바뀌었다고 알려주며 옆에서 정리를 도와주었다. 알고 보니 "ㅂ"은 색을 보는데 조금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같은 위치에 같은 색의 물감을 넣어 다녔던 것이다. 나는 그 그림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분명 입시에 필요한 절대적인 기준에는 그 색을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고유의 시선에도 사회의 제도에도 우리에게는 숨은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공감과 혐오, 아름다움과 제도를 구분 짓는 투명 장벽 같은 것인데 이 장벽을 넘는다는 게 쉽지 않다. 마치 태어나면서 나에게 주어진 바코드 마냥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기준이기도 하고 이미 사회에서 규정하여 우리에게 말해주는 기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기준들은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세분화되고 다양한 장벽은 우리의 삶을 약간 미로처럼 만든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은 분명한데 그 길까지 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미로를 통과해야 한다.
살아오면서...
그리고 금주를 하며 나를 돌아보면서...
나의 삶에 이런 장벽들이 꼭 필요했을까?
색맹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색을 보지 못하는 것을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했을까? 이외에 우리가 끝없이 생산하고 있는 남과 나를 구분 짓는 단어들은 꼭 필요했을까?
하지만 지금 나에게 그 장벽을 부수고 새로운 깃발을 흔들 시간과 능력은 없기에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 보았다. 그것은 균형적인 관점을 갖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인정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본다고 하더라도 호의적이고 친절한 태도를 누구에게나 넓게 적용하려 한다. 현실을 모른 척하고 장벽을 외면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대방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되 나의 균형은 무너지지 않고 하루를 잘 버티자는 이야기다. 나를 밟고 넘어가려는 사람들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라도 그것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면 부정적인 생각은 눈덩이처럼 키워져 나를 몰아세운다. 그것에 치어 내 삶에 균형을 잃어버리지 말자.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내가 걸어갈 길을 좀 더 넓히고 반듯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 방법은 어쩌면 우리가 다 다른 사람인 것처럼 정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길에는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타인을 탓하고 타인을 두려워하고 타인을 증오하며 타인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삶보다는 나 자신의 균형을 위해 좀 더 나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분명 큰 목표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영화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