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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Dec 02. 2023

어떤 시대, 어떤 삶. -문호사

이승증을 기리는 재실 문호사

재실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 충청지방과 경상남도 지방의 재실은 마을과 인접한 혹은 마을 한가운데 재실이 위치하는 사례가 많지만 경북 지방의 재실은 마을과는 거리가 있는, 마을 내에 있어도 외곽 쪽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공간은 결국 사유의 결과물이기에 재실이라는 공간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았는가, 그 차이에 있다고 본다. 


경주 지역의 재실은 경북 지방의 일반적인 사례와는 사뭇 다르다. 마을 변두리에 위치한 곳도 있고 반대로 마을의 중심지에 자리한 곳도 있다. 그건 아마도 처음 재실이 생겼을 때 위치를 그대로 유지한 곳도 있고 여러 이유로 새로운 장소로 옮겨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확인 가능한 정보가 없지 않는 이상 추정해 볼 수밖에 없지만, 아마도 마을 외곽에 있다 중심지로 옮겨온 사례가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는 재실을 관리할 사람을 상주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그래서 오늘날 우리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 여기, 어쩌면 지나가다 한 번쯤 보았을 재실이 있다. 첨성대 바로 옆에 있는 문호사다.


경주 핑크뮬리 단지에서 보이는 기와 지붕의 건물이 바로 문호사다.

언제, 어떤 계기로 이곳에 문호사가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관란 이승증을 기리는 장소다. 오늘날 충효동의 지명의 유래도 이승증이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시묘 살이를 했던 곳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태어난 곳은 경주였지만 대부분의 생활은 지금의 경북 경산시에서 했고 그의 무덤도 경산에 있다. 


첨성대 옆에 자리한 문호사



조선시대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그의 효행이 ‘승증여묘’ 편에 기록되어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속 승증여묘. 출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생원 이승증은 경주부 사람이다. 효도하며 아우 사랑이 천성으로 지극함을 고을에서 일컬었다. 어버이의 상을 당하매 무덤에 시묘하고 삼 년 동안 한 번도 집에 내려가지 않고 슬퍼함과 정성으로 극진하게 처음과 끝이 같게 게을리 아니하니 도적도 또한 감동을 받아 감히 여막에 침범하지 않았다. 정문을 세웠다. 








국가에서 편찬하는 기록물에 실릴 정도였으니 당시 이승증의 효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행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섰다. 이때 그의 나이 78세였다.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왜군이 쳐들어 왔을 때 맞서 싸워야지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당시의 평균수명과 의료환경을 생각했을 때 78세의 나이는 오늘날 100세 가까이 되는 나이와 같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노구를 이끌고 나섰다는 것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사회에서 어른이라는 존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어떤 지식인은 왜군의 앞잡이가 되었고 다수의 민중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각자도생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400년 뒤 일제가 국권을 침탈했을 때도 우리 생각에는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반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다수의 조선인들은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였다. 그건 시대를 불문하고, 나라를 불문한다. 어떤 사회든 그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변화가 만들어지는 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 나는 과연 어느 위치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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