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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나’ 받아들이기

10/21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기

by 오뚝이


미술수업 꼽사리 낀 날


2일 차 시험이 끝났다.

내일은 휴식일이다.

내일 시험이 없어서 그나마 아주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번 시험에 힘을 빼면 다음 순환을 달리기 힘들기 때문에 적당히 보고 있다. 객관식 개수만 확인하고 나머지 성적은 보지 않을 것이다.



나를 살리는 것은 무화과 크림치즈 휘낭시에 같은 사소한 것들이다.


어제 옆방 사람이 또 친구를 데리고 와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거에 스트레스받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에 저녁 일곱 시 반 경부터 귀마개를 끼고 공부했다.

엄마에게 방음 스티커를 벽에 붙여야 할 거 같다고 말씀드렸다.


오늘 아침에 임대인을 마주쳤는데 요즘엔 어떠냐고 묻길래 어제도 친구를 데려왔다고 아마 지금 있을 거라고 하니 임대인이 바로 옆집 문을 두드려서 이건 아니지 않냐, 한 번만 더 이러면 방 빼라고 말했다.

핵사이다...

옆방놈은 수험생이 아니고 대학생이었다.

그러니 그 쥐랄을…

좀 나가서 대외활동도 좀 하고 그러렴…


고시원은 아니지만 고시원 수준의 방음 문제.

옆방에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말소리를 내지 않아도 누가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다 든다.

그 정도로 방 사이에 벽이 부실하다. 벽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냥 판때기를 댄 거 같다.

그래서 내 정신건강을 위해 귀마개를 끼고 살기로 했다. 나의 삼만 원짜리 귀마개. 비싼 만큼 유용하다.



낙원상가까지 가서 샀지만 몇 번 안 친 기타


요즘 얼떨결에 자아성찰을 하게 됐는데 나는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옥죄며 살아왔던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시선, 사회적 기준에 맞추려 안간힘을 쓰며 살았던 거 같다. 나는 야망이 아주 큰 사람인데 그 야망도 결국 남의 시선, 사회적 기준, 남과의 비교를 통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누구도 내가 어떻게 살든 크게 관심이 없는데 나 스스로 '마땅히 이 정도는 돼야지, 이 정도는 하고 살아야지'와 같은 틀에 얽매여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내가 가진 K-장녀 특유의 성향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것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동생이 한 번 크게 사고를 쳤을 때 엄마가 '동생을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하시는 것을 듣고 내가 더 잘해야겠다는 압박감을 받았던 거 같다. 부모님이 자식복이 지지리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단지 내가 아직도 합격을 못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남한테 피해 주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고, 오히려 모범적으로 살아왔다(비록 담배는 피지만 길빵은 안 합니다.)


나는 꽤 다정다감한 성격이고, 친구도 적지 않은 편이고 부모님은 서로 사이가 좋으시다. 이 정도면 충분한 삶 아닌가? 나는 왜 만족을 못할까. 공부도 적당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며 할까.



친구의 변시 합격을 축하해 주던 날


친구에게 선물 받은 책들



설령 시험에 안돼도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스스로를 들들 볶으면서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마치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낄까. 인생 전체를 두고 봤을 때 지난 몇 년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닌데. 설령 누군가 나를 비웃는다고 해도 어차피 그 비웃는 사람들은 내 친구들이 아니고 내 인생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일 텐데. 왜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앞서 생각하며 스스로를 괴롭힐까.


나는 나다.

그냥 나.



친구의 편지


몸이 힘들어도 마음만은 평온하고 잔잔한 상태를 유지하자. 한 시간 후, 내일, 시험 후, 합격자 발표 후는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지금만 살자.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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