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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셋 Nov 29. 2019

그대여, 기죽지 마라.

나를 객관화하며 나아간다는 것.

 긍정적인 것이 능사는 아니다.


 자기 계발서를 읽고, 동기부여를 해주는 영상을 찾아보다 보면, 꼭 한 번씩은 등장하는 말이 있다. "긍정적으로 살아라."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밝은 면을 봐라." "무조건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라."


 난 이게 모든 문제의 만능열쇠 같은 정답인 줄 알았던 시기가 있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답은 아니었다.



  긍정적인 게 답인줄 알았던 시절에, 시험을 준비하면서 모의고사를 몇 번씩 친척이 있었다. 꽤나 들쭉날쭉 이었고 시험 점수가 안 나올 때는 그 어디에 지원해도 힘들 것 같은 점수가 나왔었다. 근데, 그때마다 드는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긍정적으로만 생각을 했었다. '뭐, 어때. 그저 모의고사였고, 시험 당일에는 잘 볼 거라고.' 근데, 이게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 같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이뤄야 하고 이루어야만 하는 것과  현실 사이의 차이를 그저 '긍정'으로만 채우려고 했다. 


 그러니 내가 현재 부족한 부분이, 내가 보완해야 하는 것이,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 간격을 오직 긍정으로 채우니 밟아가야 하는 과정은 옅어졌고 그래서 나중에는 그 억지로 채웠던 그 빈 공간이 더 큰 좌절로 다가왔다.


  근거가 없는 긍정은 정답이 아니었다. 근거 없이 그저 불안함을 채우기 위한 긍정적인 힘은 오히려 내가 봐야 하는 길과 현실과 내 위치를 타협하는 것을 흐리게 했다. 그래서 차근차근 밟아야 하고 계획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후회로 남았다.


 그저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늘 답이 되지 않는다. 근거가 있는 긍정적임이 만능키가 될 수는 있어도 말이다.



자기 객관화

 

 근거 있는 긍정의 힘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맞다면, 그 '근거'라는 것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답은 '자기 객관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이 하는 '나에 대한 것'의 기록이 아니라, 나를 스스로 객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타인은 나에 대해서 잘 모른다. 설사 가족일지라도. 내가 겪는 감정과 처한 상황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나다.


 경쟁해야 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는, 나를 스스로 자기 객관화하는 시간을 갖기가 어렵다. 한 부분만 보고 비판 아닌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한 순간의 실수로 자존감을 끝까지 내려 끄는 사람도 있다. 타인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수없이 노출되고 그 평가에 얽매이느라, 정작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객관화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스로 객관화를 하다가 보면 그저 "잘될 거야!"라고 외치는 것보다 내가 처한 현실과 내가 가고 싶은 길의 간격이 선명해지고, 멀리 볼 수 있게 되고 그에 맞는 목표와 계획을 짜게 될 수 있다.


즉, 내가 새로 선택하는 길까지 당도하는  얼마나 남았고  해야 하는지, 그 길이 혹시라도 실패했을  내가 감당해야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현재 시점에서 내가  길을 선택해서 얻게  것과 포기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와 같은 것들에 대해 남이 내리는 위치보다 스스로 더 세밀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아가야 하는 것들을 채워나가면 그것이 근거가 되는 것이다.



자존감을 해치지 않기


  문제는 이렇게 나를 자기 객관화하다 보면, 점점 자존감은 콩알만 해지고 하고 싶었던 것도 못 할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객관화하기 위해 나를 덜어내다 보면 내가 진짜로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이럴 때, 내가 요새 써먹는 방법이 있다.  자기 객관화를 하면서 이 단어를 붙이는 것이다. "그렇군!"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는 게, 나를 비난하고 비판하라는 게 아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디를 향하고 있고, 내 상태가 어떤지에 대한 '사실'에 깊게 고민해보는 시간이 필요한 건인데, 하다 보면 어떨 때는 '가치'가 들어가기도 한다.


  "넌 이걸 하기에는 부족해. 네가 이걸 하겠다고? 너 주제에 지금 그거 그만둔다고 또는 시작한다고 성공하겠어?"와 같은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난 "그렇군"을 이용하여 객관화를 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보자면, '난 지금 영어 성적도 부족하고, 새로 도전하는 그 분야에 대해서는 나이가 많은 편이야.'라는 자기 객관화 뒤에, '그렇군, 그러면 영어 성적은 한 달 동안 이런 식으로 해서 올려보려고 하고, 나이가 많은 편이라도 다른 부분의 강점을 살리도록 해보자.'와 같이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군!' 이 한 단어를 중간에 사용하면 내 현실이 명확해지고 그래서 나아가야 하는 길을 찾는 것이 쉬워질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난 왜 아직도 이것밖에 점수가 안 되지. 나이도 있는데 여기를 도전하는 것이 무리일까.'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줄어든다.


그러니, 기죽지 마라.


 그러니깐, 기죽지 말고 나아가자. 그 어떤 선택을 앞두고 있고 행하고 있더라도 절대로 기죽지 말자. 퇴사를 결심하고, 새로운 꿈을 찾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때로는 포기를 할 때도 타인의 평가와 스스로의 자책으로 인해서 기죽지 말고 나아가자. 


 

  긍정적인 힘은 분명히 그 힘이 있다. 자기 객관화를 하고 근거 있는 긍정적인 힘을 만드는 것은 단지 확실하게 단계를 밟아가기 위함이다. 작은 것부터 동여매서 목표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당장 채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채우면 되는 것이다. 내가 맞이한 현실과 꿈의 간격을 보되, 그것을 채우기 위해 단계를 밟아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나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깐,  지금 어떤 것을 앞두고 있더라고, 내가 가진  하나 없이 느껴지더라도, 내가 나아가야 하는 길을 보되, 기죽지 말자. 기죽지 않으며 계획하는 것이 나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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