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진담

내 추억은 33 RPM # 소개팅 편

by 김기린
아무에게나 늘 이런 얘기하는
그런 사람은 아냐
너만큼이나 나도 참 어색해
너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자꾸만 아까부터 했던 말 또 해 미안해
하지만 오늘 난 모두 다 말할 거야...

- 전람회 취중진담 중 / 작사 김동률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그전에는 막걸리 심부름을 다녀오며 몰래 홀짝 거리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술집을 드나든게 그때란 말이다.


우리세대는 전람회의 취중진담이 유행어같았고 노래도 좋았다. '취중진담'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술에 취한 동안 털어놓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을 가리킨다.


한때 의사들이 '취중진단'. 즉, 술에 취해 진료(수술)를 한 사건이 이슈가 되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한 글자 차이가 이렇게 큰 차이가 있나 싶다. 음주 운전도 아닌 음주 수술을 한 이 사건은 수술실에 CCTV를 설치해야 하느니 마느니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가끔 라디오에서 전람회의 '취중진담'을 들을 때면 지금이 잊혀지지 않는 한 사건(?)이 생각난다.


때는 바야흐로 20대 질풍노도의 시기. 서울 광장동에 있는 호텔, 서울 한강이 내려다 보이던 호텔의 주방에서 일할 때 일이다. 그때는 내 청춘의 질풍노도의 시기.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거 같았고, 불가능한 것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새장에 갇힌 것처럼 하루 종일 주방에서 똑같은 메뉴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난, 이런 반복된 일상에 슬슬 싫증이 나고 있었다. 그래도 주방에서 일하는 형들에게서 요리를 배울 수 있어 좋았고, 일을 마치고 주방에서 형들이 만든 즉석 안주로 맥주를 나눠 마시던 특권(?)을 즐기던 좋은 시절이었다.

어느 날, 주방 형이 여자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여자 친구가 없다는 걸. 아니,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걸 어찌어찌 알게 되었나 보다. 아마도 지난번 테이프가 끊길 만큼 함께 술을 마셨던 날, 모든 걸 실토한 모양이기도 했다.

주방에서 일하던 우리는 형제처럼 모두 친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천호대교를 걸어서 노래방도 자주 갔다. 아무튼 그런 친한 형으로부터 여자 친구를 소개받기로 한 날. 난 내가 갖고 있는 가장 단정한 셔츠와 바지를 다려 입고, 머리도 신경 써 약속 장소에 먼저 나가 기다렸다. 곧이어 형도 도착했다.


딸랑 거리는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내 마음도 덩달아 딸랑 거리며 자꾸 시선이 출입문을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여자들에 눈길이 가던 초조함과 기대감이 공존하는 기다림의 미학, 그 시간이 정처 없이 흐를 때. 마음속으론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나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 예쁘면 어떡하지?’, ‘아! 저 여자였으면 좋겠다’ 등 등...

그렇게 망상에 망상을 더하고, 곱하기까지 하고 있을 즈음. 그녀가 나타났다. 난 당연히 못 알아봤지만, 형이 손을 들어 보이길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술을 좋아하던 형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맥주만 잔뜩 시켜 주곤 사라졌다. 낯섦 반, 어색함 반으로 시작하던 대화는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 열심히 탐색전을 벌이는 대화가 이어졌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술과 안주가 계속 테이블 위에 쌓였다. '웃는 여잔 다 이뻐'라는 노래가 흘러나온 것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렇게 술이 취하면 모든 여자가 이뻐 보이던지.... 서울 사람 같지 않게 착했던 그녀. 난 싫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술을 잘 마시지 못했던 난, 어떻게 헤어져 숙소로 왔는지 모를 정도로 취해 들어왔다. 일어나 보니, 그녀와 함께 있던 시간, 중간중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함께한 기억은 단편 영화를 찍 듯, 함께 있다가 혼자 밖에 있다가... 어느 순간 옆에 있다가 혼자 길을 걷던 모습이 고장 난 비디오테이프를 돌리 듯 떠 오를 뿐이었다.


숙취로 지끈 거리는 머리가 고장 난 기억으로 더 아파왔다. 일단 출근이 급선무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출근을 했다.

형은 먼저 출근해 있었다. 형에게 인사를 하니, 웬일인지 형은 반가운 인사 대신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따져 묻듯. "야! 도대체 H가 누구야" 하는 것이다. 내 헤어진 여자 친구 이름을 형이 어떻게 아는가 싶어, "형이 그 애 이름을 어찌 알아요?" 하며 술이 덜 깬 와중에도 놀라서 반문했다.

곧이어 형의 꾸지람이 내 머리 위에서 융단폭격을 이어갔다.


근데 왜? 헤어진 여자 친구 이름을 그 애 앞에서 계속 말하냐고...


아! 그랬다.

술이 취해 전봇대를 잡고 오늘 마신 술들과 안주를 확인하고 있던 나의 등을 두드려 주던 그 소개팅녀. 사실 첫 만남에서 그러긴 쉽지 않았다. 나도 그건 기억이 났다. 그런 그녀를 H로 착각해 계속 H 이름을 부르며 고마워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정신이 돌아와 소개팅에게 횡설수설 한 모양인데, 처음 보던 소개팅녀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리고 만 것이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난, H 뿐이야!”


결국, 천호대교를 쓸쓸히 홀로 걸어 넘어온 나.

불꽃 따귀를 안 맞고 살아 돌아온 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취중진담을 듣다 깜짝 놀랐던 건 어쩜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날의 추억 때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날 그 천호동 술자리 어딘가에 분명 김동률이 있었던 거야!.'


당시'취중진담'이라는 노래는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다..,



https://youtu.be/lmKKoOq3A4o



* 사진(합성) : 전람회 2집, 대영AV(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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