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날 그날이 와도

내 추억은 33 RPM # LP 그리고 추억 편

by 김기린
기억날 그날이 와도 그땐 사람이 아냐
스치우는 바람결에 느낀 후회뿐이지
나를 사랑했대도 이젠 다른 삶인 걸
가리워진 곳엔 슬픔뿐인걸...

- '기억날 그날이 와도' 중 / 작사 오태호


학생 때, 용돈이 생기면 어김없이 동네 레코드 가게 '찬양사'를 참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사고 싶던 LP판을 손에 쥔 날에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식어버리기 전에 LP판의 겉 비닐을 뜯던, 그 즐거움과 설렘이 아직도 생생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난, 밀봉된 LP판의 속 비닐에서 LP를 꺼낼 때 나는 그 소리가 좋았고, 그 안에 감춰진 가사집이 좋았다. 마치 한 통의 편지를 뜯어보는 거만큼. 요즘 자주 쓰는 '언박싱' 중 으뜸은 단언컨대 LP판 개봉의 순간이리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미활동은 대가가 따르는 법.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난 그 해 여름방학을 일당 이만 오천 원짜리 공사장에서 보내야 했다. 고출력 스피커를 사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월급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내 양손에 나일론 끈으로 묶인 원목 스피커를 하나씩 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은 마치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개선장군 같았다.


문제는 오디오가 생기자 이젠 LP판들이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입을 거 못 입고, 먹을 거 못 먹어가며 애지중지 장만하던 LP판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 음악시장은 CD의 등장을 불러냈고, 몇 번의 이사 속에 LP판들과 턴테이블은 창고 어딘가에서 깊을 잠을 자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다 그 먼지 가득한 보물상자를 겨우 찾아내 햇볕에 내놓던 날.... 잊혔던 것만 같던 지난날의 추억들이 파노라마 사진처럼 생생하게 물밀 듯 밀려왔던 것이다.


지난날 즐겨 듣던 그 음반들은 하나같이 먼지가 가득하고 잡음이 많다. 듣기만 하느라, 정신이 팔린 나머지 켜켜이 쌓여 간 먼지를 몰랐던 것이다. 어쩜 그때는 그런 먼지 하나 즈음하고 가볍게 생각했을 것이다. 더러는 뭐가 급했는지 비닐에 제대로 넣어 놓지 않아 생긴 상처도 여러 군데 눈에 띈다.

그땐 왜 그랬을까?

어느덧 이마에도 LP판 소리골처럼 주름이 잡혀가고 흰머리가 희끗해진 나이...

요즘은 음반을 듣는 거만큼이나 먼지를 털어내고 세척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래야 함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세상에 찌든 내 마음의 때도 저 까만 레코드판처럼 먼지를 털어, 바람 드는 창가에 널어놓을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하나 둘 늘어만 가는 LP판들로 공간마저 비좁음을 느낄 때 즈음엔 늘어난 LP판들만큼 아내의 잔소리도 늘어간다. 특히 그리 넓지 않은 서재방에 비좁게 한쪽 벽면에 자리 잡은 음반들은 늘 아내의 따가운 눈총을 이겨내야만 한다.


회전하는 턴테이블에는 다른 음반을 올려놓을 수 없다. 늘 하나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턴테이블을 보며, 레코드판을 닦으며 문득문득 인생을 생각해 본다.



‘기억날 그날이 와도’가 실린 홍성민 가수의 음반은 내가 좋아하는 LP 음반 중 하나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노래방이 막 유행을 타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반. 인천의 어느 허름한 카페에서 들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담배 연기에 몽환적 느낌마저 물씬 풍기며 세월의 흐름만큼 낡고 군데군데 담배 구멍이 뚫린 페브릭 소파가 놓인 그 카페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곳 소파에 앉아 커피 맛도 모른 채 쓴 블랙커피를 홀짝이던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 낡은 소파의 안락함은 어느 고급 세단의 그것보다 훌륭했음은 무슨 조화일까?


텔레비전도 집도 침대도 모두 예전보다 커졌다지만, 감동도 안락함도 편안함도 예전만 못한 것이 풍요 속 빈곤처럼 느껴진다.

소주라도 한 잔 마신 날에는 어김없이 턴테이블을 찾아 추억을 걸어 놓는다. 한때 거리를 걸어도 음악은 공짜로 맘껏 들을 수 있던 시절, 사각거리는 비닐 벗겨지는 소리마저도 좋았던 그 시절을 그립게 하는 음악과 추억들....

그것이 날 오늘도 턴테이블 앞에 앉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 가수 홍성민 님은 2007년 7월 31일. 신촌의 한 카페에서 급성 뇌출혈로 쓰러진 뒤, 1주일의 투병 끝에 8월 6일 하늘에 별이 되었다. 향년 44세.


https://youtu.be/0JkYQuUPtlE?si=tnfjf3Ityt75_uEg



* 사진(합성) : 홍성민 1집, 뮤직디자인(1990년)

keyword
이전 12화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