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Music
솔박카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다. 안나는 일을 하는 동안 세계 각국의 음악을 틀어 놓는다. 저녁에는 간혹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어쩔 때는 악기를 들고 와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딱히 합창이나 제창을 할 노래가 없어서 주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페트라는 반주에 맞는 멜로리를 즉흥적으로 창작해서 흥얼거렸다.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이 다들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악보가 없어도 같이 합주를 했고 재즈식으로 잼 세션을 가졌다.
찰리는 수많은 악기를 가지고 있었고 또 모든 악기에 능통했다. 심지어는 처음 보는 악기마저 한두 번 만져 보고 나면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터키에 갔을 때 골동품 가게에서 터키의 전통 악기를 발견한 적이 있다. 악기점 주인은 건들지 말라고 경고했고, 건드리다가 망가트리면 사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찰리는 너무 궁금해서 주인이 안 볼 때 몰래 그 악기를 만졌다. 주인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눈을 돌려 보니 찰리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골동품점 주인은 찰리의 재능에 놀랐고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그 악기를 찰리에게 싸게 팔았다. 내가 잠을 자던 유르트의 벽에는 여러 종류의 악기가 매달려 있었는데, 모두 내가 처음 보는 악기들이었다.
아나티나는 아주 특이한 악기를 가지고 있었다. 휴대할 때는 그냥 나무 가방 같이 보였는데, 뚜껑을 열면 합시코드 같은 것이 나왔다. 아나티나는 그 악기가 쳄발로라고 했다. 쳄발로는 합시코드의 독일어인데, 내가 알고 있는 합시코드보다 훨씬 작았다. 내가 봤던 합시코드는 좀 작은 피아노 같았다. 대학교 때 학교 숙제로 클래식 음악 콘서트를 감상한 후 감상문을 쓰는 것이 있었는데, 작은 피아노를 봤다고 했다가 그것이 합시코드라고 정정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나티나의 쳄발로는 테레민 이후 내가 본 가장 신기한 악기였다. 테레민은 손으로 악기를 건드리지 않고 연주를 하는 마법과 같은 악기다. 아나티나는 그 쳄발로를 아주 능숙하게 다루었다. 하지만 그 악기를 꺼내는 일은 흔치 않았다.
안나의 아들 빌렘이 솔박카에 놀러 온 적이 있다. 안나도 키가 컸지만 빌렘은 진짜 컸다. 190cm는 충분히 넘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금발의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피부는 새하얬다. 어느 날 오후 그가 첼로를 가지고 나왔다. 바위 위에 의자를 놓고 첼로를 켰다. 웃통을 벗고 새 하얀 피부를 내놓은 채 꽃과 풀을 배경으로 바위 위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은 마치 한 명의 엘프 같아 보였다. 게다가 해가 지는 노을녂과 첼로 음악의 조화는 누구라도 그에게 반할 것 같았다. 그는 첼로를 안 다룬 지 너무 오래되어서 이제는 더 이상 잘 연주할 수 없다고 했다. 활을 잡는 법이나 연주하는 모습은 전문가 같았지만 멜로디는 간혹 놓치곤 했다. 독일에서 온 알렉스는 빌렘과 무척 친하게 지냈는데, 그래서 그녀도 첼로를 연주해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활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연주할 때는 자꾸 쇠 긁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났다. 참고로 이 알렉스는 앞서 소개한 세명의 남자 알렉스가 아닌 여자 알렉스다.
나도 한번 첼로를 연주해 보았다. 나의 동생이 첼로를 연주하긴 했지만 동생은 내가 그녀의 첼로를 건드리지도 못 하게 했기 때문에 막상 연주해 본 적은 없었다. 어렸을 때 친구의 바이올린을 한번 만져 본 것이 내가 경험한 활을 쓰는 현악기 연주의 모두였다. 하지만 보고 배운 게 있었는지 나의 녹슨 기타 실력이 남아 있는 것인지 나는 거의 세 번 만에 반짝반짝 작은 별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할 수 있었다. 물론 연주한 나도 놀라긴 했다.
한 번은 밀카가 다 같이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일종의 작은 음악 모임인데, 막상 그때 솔박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다 모였다. 그녀는 어디선가 복사해온 낱장 짜리 악보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작은 수첩을 보고 기타를 연주했다. 수첩에는 노래의 가사와 코드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기타를 아주 잘 쳤다. 사람들은 악보에 따라 노래를 불렀는데, 솔박카에 살던 사람들은 노래를 좀 아는 것 같았다. 나를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은 다 생소한 노래였다. 노래는 영어가 아닌 산스크리트어였다. 물론 글자는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알파벳을 사용해서 읽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분위기를 봐서는 힌두교의 찬송가 같았다. 한 노래의 가사는 '자이 가네샤'가 전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이 가네샤'만 반복을 했다.
얼마 전까지 나는 인도에 있었기 때문에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이는 '찬양하라'는 뜻이다. 가네샤는 파괴의 신 시바의 아내 파르바티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시바의 아들이 아니고 파르바티가 혼자 만들어 낸 아들이다. 가네샤의 창조신화 세 가지를 들었는데, 세 번 다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 어쨌든 힌두교에서는 가네샤가 장애물을 없애주는 신으로서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기 전에 가네샤에게 먼저 경배를 한다고 한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할 때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을 미리 다 없애기 위해서다. 솔박카에는 특별한 종교가 없었지만 솔박카의 많은 사람들은 힌두교의 철학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자동차에는 태조 우주의 소리를 상징하는 '옴'이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장식하기도 했고, 가네샤 인형을 올려놓기도 했다. 게다가 힌두교 신을 찬양하는 모임까지 가졌다. 악보를 보고 같이 합창을 하는 것은 개신교의 소모임에서 찬송가를 보고 부르는 것과 무척 비슷했다.
솔박카에는 음악이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유행가나 대중음악은 거의 없었다. 안나가 틀어 놓는 음악에는 아프리카의 음악도 있었다. 아마 아프리카를 떠나서는 아프리카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나도 솔박카에 있을 때 들은 아프리카 음악은 평생 다 들을 아프리카 음악보다 더 많을 것 같다. 어떤 노래는 익살스러웠다. 스페인어 노래가 있었는데, 음악 자체는 무척 흥겨웠지만 단어는 고작 세 단어를 계속 반복할 뿐이었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사람도 가사를 100%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