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13) 윤위동 개인전
이름으로 놀림 받은 기억이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하필 그 많은 석 자 중에 내 아버지는 돌 석(石)을 고르셨을까. 다 자라서 여쭤보니 험한 세상에서 돌처럼 단단하게 살라는 의미로 그리 지으셨단다. 심지어 옥편을 들고 장장 일주일을 고민해서 얻은 이름이라고 하셨다. 아니 도대체 왜? 원망스러웠다. 이름으로 놀림을 당하는 일은 군 복무 시절까지 이어졌다. 물론 다 큰 어른이 된 뒤에는 누가 놀려도 그냥 같이 웃고 만다. 지금은 오히려 내 이름이 좋다. 나는 정작 다른 사람들 이름을 까먹는 일이 많은데, 남들은 내 이름을 까먹는 법이 없다. 잘 기억되는 이름이라서 그렇다.
윤위동 작가의 그림 속 주인공은 돌이다. 윤위동은 돌에 생을 투영한다. 깨알같이 가는 모래가 엉기고 뭉쳐 돌이 되고, 그 돌이 다시 무수한 마찰과 마모를 거쳐 빛나는 보석이 되기까지는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이 필요하다. 억겁의 시간 속에서 자연은 끝없이 순환한다. 윤위동은 돌을 그린다. 그 돌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 그 어떤 고난과 시련도 묵묵히 견뎌내는 인고의 상징이다. 그러니 그림의 돌은 단순한 돌이 아니다. 의인화한 돌은 인격을 얻는다. 윤위동의 그림은 돌의 초상이다. 나는 돌이다. 그러므로 윤위동의 그림은 내 초상이다. (삼단논법의 쓸모를 확인한 벅찬 순간이다.)
윤위동 작가를 처음 만난 건 2015년 여름이었다. ‘수채화’를 주제로 두 화가를 묶어서 뉴스를 만들려고 수소문하다가 윤 작가를 소개받았다. 당시 윤위동 작가는 극사실주의 기법의 수채화로 인물을 주로 그렸는데, 금방이라도 그림 밖으로 튀어나올 듯 생생한 묘사가 감탄을 자아냈다. 수채물감으로 저렇게까지 그려낼 수 있다니.
시간이 흘러 2019년 서울시 종로구 성북동에 있던 더 트리니티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사계 The Four Seasons : eternity of life>에서 윤위동 작가를 다시 만났다. 이 시기에 작가는 이미 돌을 그리고 있었다. 윤위동은 돌에 자기 모습을 투영했다. 그리고 돌을 그린 모든 작품에 ‘독백(monologue)’이란 제목을 붙였다. 돌에 자기 모습을 투영하고, 돌을 통해 내면의 이야기를 토로한다는 것. 그런 작가의 진지한 고민이 그림에 담겼다.
또 시간이 흘러 오랜만에 윤위동의 개인전을 찾았다. 그동안 이름만 들어온 창덕궁 부근의 나마갤러리를 처음 방문했는데, 이 일대의 전시공간으로는 꽤 분위기도 좋고 쾌적하다. 1층 전시장에선 같은 제목의 신작을, 2층 전시장에선 그전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신작은 모래밭을 배경으로 돌이 만들어낸 흔적을 형상화했다. 축축하게 젖은 모래땅과 햇빛이 만들어낸 그림자까지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빚어낸 마냥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화면에서 또다시 내 모습을 발견한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돌의 순환과 완성을 우리의 삶에 투영시키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좋은 환경이든 열악한 환경이든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는 가장 귀하고 행복하면서도 한편 힘든 것이다. 그래서 그 삶을 살아내는 모든 이가 참 귀하고 아름답다. 이러한 삶 자체가 하늘의 선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