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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일본 근대미술가 7인의 삶과 예술

석기자미술관(163) 서경식 <나의 일본미술 순례 1>

by 김석 Mar 05. 2025



2023년 타계한 재일조선일 2세 출신의 디아스포라 지식인 서경식 전 도쿄경제대 교수가 미술 잡지 『월간미술』 2020년 6월호부터 2021년 12월호까지 연재한 기사를 다듬어 묶은 책이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카무라 쓰네(中村彝, 1887~1924), 사에키 유조(佐伯祐三, 1898~1928), 세키네 쇼지(関根正二, 1899~1919), 아이미쓰(靉光, 1907~1946), 오기와라 로쿠잔(荻原碌山, 1879~1910), 노다 히데오(野田英夫, 1908~1939), 마쓰모토 슌스케(松本竣介, 1912~1948) 등 일본 근대미술가 7명의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했다.     


윗줄 왼쪽부터 나카무라 쓰네, 사에키 유조, 세키네 쇼지, 아이미쓰, 오기와라 로쿠잔, 노다 히데오, 마쓰모토 슌스케


  

생몰년을 보면 알다시피 1879년에서 1912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은 전부 마흔을 못 넘기고 병으로 요절했다. 궁핍한 시대의 미술가들이었다. 작품 활동을 지속한 기간은 그보다 더 짧다. 그런데도 치열하게, 때로는 목숨과도 맞바꾸겠다는 열의로 자기 예술에 몰입했고, 그렇게 일본 근대미술사를 대표하는 미술가로 남았다.     


그중에서도 사에키 유조(佐伯祐三, 1898~1928)는 실로 그림에 미친 화가로 불릴 만했다. 수많은 한국의 화가 지망생이 유학한 도쿄미술학교 출신인 사에키는 1924년 프랑스 파리에 가서 저명한 야수파 화가 모리스 블라맹크를 만나 호된 비판을 받는다. 이 경험이 그의 예술 세계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았다. 2년 뒤, 고국으로 돌아간 사에키가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들은 일약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그림이 되지 않았다. “안 돼. 일본에서는 도대체 그릴 수가 없어. 일본의 풍경은 도무지 내 그림이 되질 않아. 파리로 돌아갈까 생각 중이야.” 훗날 『사에키 유조』의 저자는 이렇게 썼다.   

   

일본은 하이쿠(俳句)의 나라단카(短歌)의 나라단시(短詩형태 문학의 나라다유카타(浴衣목욕 뒤나 여름철에 간편히 입는 홋겹의 전통 의상)와 훈도시(남자의 사타구니를 가리는 좁고 긴 천)의 나라다오월 단오에 고이노보리(のぼり천이나 종이로 만들어 장대 끝에 매단 잉어 모양 깃발)가 휘날리는 나라다나무와 종이의 나라몽롱한 산수와 운무(雲霧)에 취미가 있는 나라다이러한 풍토에서 사에키 유조의 예술은 도저희 뿌리내릴 수 없었다.”     


1년 만에 사에키는 다시 파리로 간다. 2차 파리 체류 5개월 만에 그림 107점, 6개월째엔 145점을 그렸다. 일본의 습윤한 풍토를 그려야 한다는 것만으로 그렇게도 괴로워했던 사에키에게 파리는 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쿄미술학교를 나온 오지호 또한 일본 특유의 풍토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백한 바 있다. 사에키는 도쿄로 올라와 가와바타화학교에 입학해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1867~1943)의 지도를 받았다. 후지시마는 오지호의 도쿄미술학교 시절 스승이다.     


한국의 자연은 일본의 자연과는 달라청징하고 밝고환한 것이 한국의 자연이라면 일본의 자연은 어둡고 침울한 것이 특징이지습기가 많기 때문이야맑고 밝은 한국의 자연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사실주의나 자연주의또 추상주의로는 어울리지가 않아찰나적인 외광에 의해 영감을 자극표현되는 인상의 기법이 적격이지.”     


이렇게 일본 근대미술가들 상당수가 한국과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오지호처럼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유학한 한국 화가들이 그들과 같은 학교에서 같은 스승에게 그림을 배웠기 때문. 그러므로 한국 근대미술을 알려면 일본 근대미술을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모른다. 모르면서 애써 외면한다. 심지어 책도 없다. 그러니 한국에서 활동하며 한국 근대미술 형성에 깊은 영향을 준 일본 화가들에 관한 연구가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다. 국내 연구자 중에선 황정수 선생이 이 분야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이숲, 2018),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전 2권, 푸른역사, 2022)를 읽어보라.     


일본 근대미술에 대한 갈증이 심하던 차에 만난 이 책은 무척이나 귀하다. 다만 제목에 <1>이라고 적었을 만큼 후속 작업에 열의를 불태우던 저자가 2023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나의 일본미술 순례>는 한 권으로 끝났다. 아쉬운 마음으로 책에 수록된 일본 근대미술가 7명의 작품을 각각 두 점씩 도판으로 소개한다.     


나카무라 쓰네, <두개골을 든 자화상>, 1923, 캔버스에 유채, 101×71cm, 오하라미술관
나카무라 쓰네, <에로센코 씨의 초상>, 1920, 캔버스에 유채, 45.5×42cm,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사에키 유조, <가스등과 광고>, 1927, 캔버스에 유채, 65×100cm,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사에키 유조, <모랭교회>, 1928, 캔버스에 유채, 60×73cm,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세키네 쇼지, <신앙의 슬픔>, 1918, 캔버스에 유채, 73.0×100.0cm, 오하라미술관
세키네 쇼지, <죽음을 생각한 날>, 1915, 캔버스에 유채, 75.7×56.8cm, 미에현립미술관
아이미쓰, <눈이 있는 풍경>, 1938, 102×193.5cm, 캔버스에 유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아이미쓰, <흰 상의를 입은 자화상>, 1944, 79.5×47cm, 캔버스에 유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오기와라 로쿠잔, <갱부>, 1907, 브론즈, 47.5×45.5×33.5cm, 로쿠잔미술관
오기와라 로쿠잔, <여인>, 1910, 브론즈, 98.5×47.0×61.0cm, 로쿠잔미술관
노다 히데오, <노지리 호숫가의 꽃>, 1938, 보드에 유채, 33×24cm, 가이타 에피타프 잔조관
노다 히데오, <귀로>, 1935, 캔버스에 유채, 97×146cm,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마쓰모토 슌스케, <화가의 상>, 1941, 나무판에 유채, 162.4×112.7cm, 미야기현미술관
마쓰모토 슌스케, <운하 풍경>, 1943, 캔버스에 유채, 45.5×61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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