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뜻하지 않던 퇴근길 교통사고로 등 떠밀리 듯 휴직계를 내야 했다. 휴직 기간 동안 부지런히 운동으로 근육을 다져 아픔을 이겨내려는 나의 휴직 돌입시의 야심찬 초반 계획과 다르게 추운 계절 밖으로 나가기만 해도 아려오는 통증과 몇 번 재활 운동의 시도 후 더 큰 통증을 겪는 것을 반복하던 끝에 그저 금쪽같은 황금 시간을 그저 누워서 잠만 자고 창문 밖 숲길 멍으로 대부분 일상을 소비하는 시간 낭비와도 같은 단조로운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어느덧 시간이 흘러 휴직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그동안 무료함으로 비축한 약간의 에너지를 끌어 모아 바깥나들이를 나가 볼 용기가 생겨났다. 나의 휴직 여행에서 집 앞 산책길은 나의 휴직 여정에 걸음마와도 같았던 첫걸음이었다.
태풍이 한차례 지나간 다음날 태풍은 세상의 더러움조차 모두 동쪽으로 쓸고 가버렸는지 하늘은 맑게 개여 쨍하고 공기는 티끌 하나 없이 청량했다. 덥지도 그렇다고 쌀쌀하지도 않을 적당한 날씨가 선뜻 내민 따스한 손길에 이끌려 이어폰과 모자,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에 나선다. 주말 휴일에는 병원도 바깥나들이도 잘 가지 않았던 나인데 오늘은 때마침 주말이었다. 주말에 나서지 않는 제일 큰 이유야 물론 코시국에 인파 많은 북적거림과 혹시 모를 확진자와의 동선 겹침이 싫어서겠지만, 한편으로 난 지금 무급휴가 중인데 다른 사람들은 월급을 받아가며 한가로이 쉬는 것 같아 그들과 차별화된 여유로움을 즐기고 싶어서기도 하다. 이번 주말은 특히나 이틀 주말뿐 아니라 추석 연휴까지 연이은 5일 장기휴가라, 왠지 내가 크게 밑지는 기분이기도 하고 아직 패들 요가에서 얻은 근육통이 잔잔하게 남아 있던 터라, 연휴에는 되도록 조용히 집에서 쉴까 했는데, 그 어느 때보다 포근한 날씨와 말도 살 찌운다는 푸르른 하늘이 나를 바깥세상으로 조용히 이끌었다.
우리 집 거실 밖으로 보이는 산책길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간다. 새해 해돋이 때는 이 작은 마을에 사람들이 다 몰려들었는지 못해도 천명 남짓한 사람들이 한두 시간 동안 끝없이 쏟아져 내려온다. 대체 저기에는 무슨 꿀단지라도 숨겨져 있는 건지 벌과 나비들이 끊이지 않는 그 길을 따라 꿀벌처럼 부지런히 올라가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경산 반곡지가 여기 있었나 싶은 하늘을 거울삼아 비춰주는 예쁜 저수지가 있다. 이보다 고운 스케치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연의 물감을 곱게 풀어 산과 하늘을 데칼코마니처럼 그려 넣은 듯한 저수지다. 여기까지 닿는데 느린 내 걸음으로 10~15분 정도 소요된다. 한창 아프던 겨울의 끝자락에는 이 짧은 거리의 저수지까지 걸어오려다 그만 오른쪽 다리가 아파와 이내 저수지 구경도 못한 채 포기하고 돌아간 적도 많았다. 겨우내 밖에만 나가도 추위에 어깨가 움츠려 들어 그런지 목, 어깨가 아려와 한참 아픔으로 고생한 기억에 나는 지금도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이 두렵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항상 이 저수지까지만 돌고 정자가 보이면 다시 발길을 되돌려 집으로 향한다.
나의 노선의 변곡점이 된 저수지 정자. 여기에서 기계로 신발에 묻은 흙을 한번 털어주고 턴해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갑자기 벼룩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벼룩은 더 높이 뛸 수 있지만 유리 천장에 한번 부딪히면 부딪힌 아픔에 유리천장을 치워도 계속해서 천장이 있던 위치까지만 뛴다고 한다. 나도 벼룩과 같았다. 한차례 아픔을 겪다 보니 몸이 그 아픔을 기억해 나를 아프게 했던 동작이나 상황을 그다음부터는 아파서라기보다는 해보지도 않고 무의식적으로 피하게 된다. 나는 아직 옆으로 누워 자질 못하고, 뛰는 것도 해보질 않았다. 모두 나를 엄청 아프게 했던 동작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 저수지 이상을 나아가 보지 않아서 그다음 길은 무엇으로 이어지는지 모른다. 카페 가는 길을 차로 몇 번 이동하며 지나가면서 돌아본 큰 저수지가 하나 더 있다는 것 정도만 안다. 이 작은 저수지는 벼룩인 나에게 언제나 유리천장과도 같았다. 하지만 오늘 청아한 하늘과 청량한 날씨가 내게 용기를 북돋아, 곧 예정된 해양스포츠 일정과 복직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체력을 끌어올려야겠다는 새롭게 끓어오르는 의지로 유리천장을 한번 뛰어넘어보자 결심했다.
매번 발길을 되돌려 돌아갔던 그 변곡점을 넘어 서니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계곡물이 졸졸졸 때로는 힘차게 흐르는 소리와 매미소리 새소리마저 여유롭고 좋아서 유리천장을 뛰어넘은 기념으로 휴대폰에 담아본다.
벤치도 앉아보았다가, 처음 보는 풍경들을 찬찬히 훑어가며 천천히 걷다 보니 큰 저수지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저수지는 아이들 놀이터나 어르신들 운동기구 화장실 테이블과 벤치, 테니스, 배드민턴 네트 등 편의시설이 꽤 잘 되어있다. 자라의 태닝 포인트는 볼 때마다 항상 같은 바위다. 좋은 햇살을 알아보는 건 사람이나 동물이나 매한가진가보다. 놀이터 부근에서 한 아이가 잉어와 자라에게 먹이를 주고 있자니 물에 숨어 있는 줄도 몰랐던 잉어 떼와 자라 떼들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어 존재감을 부각한다.
저수지를 한 바퀴를 돌고 햇빛에 따스하게 데워진 벤치에 앉아 있으니, 살랑이는 바람결이 만들어낸 잔물결이 그려내는 저수지를 바라보며 덩달아 춤추는 눈과 벤치의 온기로 따스한 등, 벤치에 앉아 잠시나마 편안해진 다리와 감미로운 음악으로 호강 중인 귀와 맑은 공기에 이따금 바람에 실려오는 풀향과 꽃향으로 코까지 모두가 만족하며 힐링 중이다.
이렇게 조금만 발길을 뻗으면 가까운 곳에 힐링 스팟이 있었는데 나는 항상 유리 천장에 부딪혀 그 길을 보지 못하고 등을 돌려 돌아만 가야 했던 것인가. 지난 시간들이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들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휴직기간 동안 하나하나 나에게 습관처럼 남아있는 유리천장에 하나씩 도전해봐야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산책길에서 만난 길고양이를 위한 일용의 양식과 여치의 소소한 풍경
바쁜 일상에 오늘 하루 산책을 거르신 분들을 위해 잠깐 휴식과도 같은 저의 집 앞 여정 산책길 글을 선물합니다. 그리고 저의 유리 천장 깨기 산책길을 보신 분들도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유리 천장에 용기 내어 도전해보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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