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더 나은 세상,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노력보다는 자기 한 몸의 부귀영달을 위해 배움을 사용한 결과다.'라는 문장이 진정으로 뇌리에 남는다. 이 문장이 가장 뇌리에 남는 이유는 언젠가 필자인 '나'의 가치관도 자기 한 몸의 부귀영달을 위해 타인의 소유까지 탐하여 양심을 저버리는 결과가 올까에 대한 두려움이자 숙고다. 과연 지식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구조적 악에 동참하는 개인은 단체라는 이름 속에 숨어 이기적 행위를 하는 사회 구조 속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더 나은 세상과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그릇이 있는 사람일까? 지식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10년 뒤 20년 뒤 50년 뒤 지금 갖고 있는 가치관을 저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본인
부르디외는 사회의 계급 질서는 단순히 경제 자본의 많고 적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문화 자본의 습득과 과시 전략에 의해 계급적 우열이 드러나고 이에 기초한 상징 권력이 계급 격차를 유지하는 수단이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입학사정관제 전형에서는 더 많은 문화 자본을 가지고 있거나 풍족한 경제적 여건을 바탕으로 자녀에게 더 맣은 문화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계층이 혜택을 입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아빠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식당에서 홀 서빙을 하는 엄마를 둔 자녀가 입학사정관제 전형을 통해 합격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들은 이 새로운 전형에 대비하기 위한 정보를 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학에서 배울 전공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준비와 학습, 문화적 경험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 대치동 80p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라는 서적을 필자도 읽은 적이 있다. 잠시 아비투스에 대하여 언급해 보겠다.
아비투스(프랑스어: habitus 아비튀스[*])는 인간 행위를 상징하는 무의식적 성향을 뜻하는 단어로, 피에르 부르디외가 처음 사용하였다.[1] 이런 아비투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육이다. 즉, 아비투스는 복잡한 교육체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무의식적 사회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교육을 통해 상속된다.[1]
아비투스는 구조와 행위자를 혼융시키는 촉매로, 문화적 자본과 연결되며, 이런 문화적 자본을 가지고 부르디외는 현대사회의 사회관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대치동>이라는 서적을 읽으며 아비투스는 대치동과 학벌주의에서도 적용된다고 사료된다. 해당 서적에 따르면 2009년부터 이들 계층에서 입학사정관제를 위한 과감한 인적, 경제적 지원의 시작은 학과 공부 이외에 전공 적합성을 위한 경험을 확충하기 위해 모든 자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또한 교사들은 대학교수나 전문직 학부모를 연결해 이들이 품앗이를 통해 자녀의 스펙 쌓는 일을 서로 돕도록 주선했으며, 부유하거나 부모의 학력 수준이 높은 집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변호사 사무실로, 검찰청으로, 병원으로, 사회단체로 실려가 인턴으로 일하거나 봉사 활동을 수행하며 연구소에서 실험에 참여하거나 논문에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최근 시청한 드라마 <SKY 캐슬>에서의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장면과 유사하다.
계급 격차는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입학사정관제를 준비하는 금수저와 논술 및 정시를 준비하는 흙수저는 교실 안에서 한눈에 구분되었다. -대치동 83p
'계급 격차는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개인적으로 꽤 공감이 가는 부분은 이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을 끝마치고 재수를 하면서 연세대에 재학하는 여학생분의 유튜브 콘텐츠를 한동안 시청했던 적이 있다. 그때부터 지역 간의 격차와 혜택에 대하여 자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전국 단위로 관찰하자면 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지역에 따라 자동적으로 조성되는 분위기와 환경적 뒷받침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학벌주의는 없어지고 있다는 추세이기는 하나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필자도 학벌주의에 따른 혜택의 수혜자분들은 정당한 노력의 대가임과 동시에 노력의 대가를 이룰 수 있게 된 환경적 조성의 여건도 분명히 작용했다고 본다. 이것은 재미있는 사실이자 시사점이다. 출생의 시기부터 계급이 정해지는 이른바 계급제는 한국에서는 폐지된 지 오래지만 엄연히 능력주의로 포장된 보이지 않는 계급과 문화는 현존한다고 사료된다.
상대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학벌주의는 공고한 집단적 차별을 만드는 연고주의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아비투스의 영향이며, 유산이다.
대치동의 전월세 상승은 그렇게 수도권 전체의 전세 대란으로 이어진다. 그 대란의 아수라장 속에서 자식 교육에 성공하고 하는 일도 없이 가진 집으로 돈까지 버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이들은 너도나도 시세 차익을 얻기 위해 더 좋은 입지를 찾아 헤맨다. 그렇게 전국은 부동산 투기의 온상이 된다.
그 정점에 사교육 1번지라는 최고의 입지를 가진 대치동의 주택과 아파트들이 있다. 이곳의 집들은 점점 낡아가지만 값은 나날이 오른다. 그 오른 돈으로 재건축을 해서 용적률이 더 높은 건물을 짓고, 더 많은 돈을 벌겠다는 집주인들의 탐욕에는 끝이 없다. 너도나도 탐욕을 부리니 재건축에 반대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155p
전국적으로 많은 문제가 야기된 부동산 투기의 문제. 필자가 이용하는 밀리의 서재에서도 메인 상단에 위치하는 카테고리에 주식과 부동산이 빠지지 않는다. 필자는 시장 경제와 금융 경제가 활성화된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경제 및 금융지식은 꼭 필요하다고 여긴다. 주식이나 부동산 관련한 지식도 마찬가지다. 현 한국은 70년대 경제성장의 시기에 비하여 금리가 매우 낮아지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시장의 물가가 급증하고 있는 현 상태에서 더 이상 저축으로는 노후를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치동>에서 언급된 부동산 투기의 문제의 복잡한 현상의 원인과 향후에 야기될 한국 사회의 악영향은 개인이 구조적 악에 편승함으로써 단체라는 이름 하에 숨겨진다. 부동산 문제는 정부의 정책의 문제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과실의 근본 원인인 개인은 단체라는 이름 하에 숨겨질 경우 책임을 회피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과연 부동산 투기로 인하여 증가하는 무주택자들과 같은 사회 현상은 앞으로 어떤 대책이 나와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입시의 다양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 여러 갈래의 길 가운데서 학생들을 안내할 조력자, 상담가, 가이드가 없는 것이 문제다. 우리의 정부에 요구해야 할 것은 공교육 안에 더 많은 상담 인력을 배치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학생 각자가 자신의 적성과 관심사를 찾아내 계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 대치동 367p
대학 입시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면서 또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글쓰기다. 앞서도 말했지만, 글쓰기는 모든 학문과 사회적 소통의 근간이다. 자신이 경험하고 탐구하여 이해한 바를 글로 적어 후대에 전하는 것이 학문이라면, 공동체가 생산한 정보와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내 생각을 표현해 교류하는 것이 인간의 사회적 삶이다. 따라서 학문의 발전과 소통하는 삶을 위해서는 글 읽기와 쓰기 교육은 필수여야 한다. - 대치동 367p
더 나은 세상,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노력보다는 자기 한 몸의 부귀영달을 위해 배움을 사용한 결과다. 놀라운 것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기 자식은 서울대, 명문대에 보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는 점이다. 내 자식이 배움을 통해 편히 살기를 바라며 오로지 그것을 위해 공부를 시키는 나라에서 지식인과 학벌에 대한 존중은 자라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더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 부동산과 학벌을 좇는다. 강남, 그중에서도 대치동은 이 소득 증대를 위한 세속적 욕망의 집결지다. 이곳 사람들은 부동산을 통한 불로소득과 학벌을 통한 소득 뻥튀기를 통해 재산 증식과 계급 상승을 꿈꾼다. 그 과정에서 일한 만큼의 소득을 얻어 가는 노동 윤리의 정당성은 파괴되고, 반지성주의가 자라난다. 누구도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 학벌을 욕망하는 기이한 현상이 초래된다.- 대치동 193p
노동의 가치와 지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도 우리는 존귀해질 수 있을까. 193p의 부제다. 차별과 착취 속에서 어느새 자신의 기술이나 육체노동을 비천한 것으로 여기며 자녀 세대는 그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는, 노동과 배움에 대한 우리 인식의 단면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저자의 서술이 노동의 가치가 쇠퇴되어 무노동을 염원하게 된 현 사회적 상황을 숙고하게 한다.
'더 나은 세상,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노력보다는 자기 한 몸의 부귀영달을 위해 배움을 사용한 결과다.'라는 문장이 진정으로 뇌리에 남는다. 이 문장이 가장 뇌리에 남는 이유는 언젠가 필자인 '나'의 가치관도 자기 한 몸의 부귀영달을 위해 타인의 소유까지 탐하여 양심을 저버리는 결과가 올까에 대한 두려움이자 숙고다. 과연 지식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구조적 악에 동참하는 개인은 단체라는 이름 속에 숨어 이기적 행위를 하는 사회 구조 속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더 나은 세상과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그릇이 있는 사람일까? 지식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학벌주의로 인해 교육열로 뜨거워지고, 뜨거워진 교육열이 학벌주의를 담금질한다. 우리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바람직한 교육과 행복한 삶을 위한 그 어떤 구상도 우리의 삶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대치동 398p
“YES24 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