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좋은 예술은 좋은 삶으로부터 나오며, 그 좋은 예술이 예술가에게 다시 좋은 삶을 마련한다.
아무튼, 클래식 中
막상 연주가 시작되자 무언가 뜨거운 게 올라오는 듯했다. 특히 피아노 선율은 그날의 내게 완벽한 위로였다. 고독한 작곡가가 스스로를 위로하듯 그려놓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처연하게, 손에 잡힐 듯 생동감 넘치게 펼쳐졌다. 덕분에 품게 된 온기를 가지고 꾹꾹 눌러 걷던 귀갓길의 그 마음까지, 음악을 좋아하게 되는 일에는 이렇게나 많은 요소가 개입한다. - 아무튼, 클래식 中
음악을 좋아하게 되는 일에는 이렇게나 많은 요소가 개입한다.- 필자도 피아노 선율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피아노 선율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들을 때면, 필자의 시야에 들어오는 환경과 색조가 귓가에서 들려오는 음색과 접목되어 그림을 펼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음악을 듣는다는 건 현실과 떨어진 어느 세계를 여행하는 일과 비슷하다. 그런 세계 중에서도 감정적으로 풍부한 재미있는 것이 많은 세계라면 처음 마주했을 때와 두 번 세 번 다시 찾았을 때의 감흥이 다를 것이다. 물론 어떤 마음가짐으로 여행하느냐에 따라서도 보이는 풍경은 바뀐다. 누구와 함께하는지, 어떤 차림으로 어떤 표정을 지은 채 어떤 기분으로 여행하느냐도 마찬가지다. 그 조건을 모두 따져본다면 음악은 도무지 같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그 오래된 음악을 오늘에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 아무튼, 클래식 中
또한 필자는 음악을 감상할 때 현실과 접목시켜 배경음악으로 듣는 편이다. 저자가 언급한 내용 중 흥미로운 점은 처음 마주했을 때와 두 번 세 번 다시 찾았을 때의 감흥이 다를 것이라고 했던 점이다. 음악도 어느 공간에 있으며 누구와 마주하고 있느냐에 따라 들을 때의 감상과 기분이 현저하게 다를 때가 있다. 음악은 각각의 고유한 색을 띠며, 다르다.
그렇기에 클래식과 같은 음악, 그 오래된 음악을 오늘에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는 것. 고전 클래식은 오늘날까지 세계의 많은 이들이 반복해서 듣고 또 듣는 곡들이다. 누군가는 고전 클래식을 감상하며 그 각각의 감상이 다를 수 있다. 그런 연유로 음악을 지속적으로 음미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듣는 사람과 음악 작품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점점 더 가까워지기도, 더 좋아지기도, 혹은 심드렁해지기도 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마음을 나눈 음악을 천천히 떠올린다. 녹음물을 재생하고, 음상을 포갠다. 오롯이 즐거움만으로 음악을 만나려니 어쩐지 어색하기도 하다. - 아무튼, 클래식 中
듣는 사람과 음악 작품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 저자의 한 문장이, 공감을 자아내는 것 같다. 저자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마음을 나눈 음악을 천천히 떠올린다고 했다. 필자도 그런 경험이 있다. 삶의 특정한 순간 혹은 특정한 배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그때 상황과 잘 어우러지는 음악이 떠오르고는 한다. 그런 상기 하나하나가, 끊어져 있던 그 음악과 다시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뛰어난 연주자의 손을 잡고 작곡가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쁨에 대해서도 천천히 이야기하고 싶다. 생각지도 못한 길을 안내하는 연주자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클래식 음악 세계의 재미 중 하나니까.
음악의 정말 중요한 역할은 소통보다 명상인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듣고 감동하느냐보단 단 몇 사람이라도 고요히 생각에 잠길 수 있고 사색과 관조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클래식 음악의 가치란 거기서 발현된다. - 아무튼, 클래식 中
개인적으로 음악 플레이리스트가 곡들이 추가되기는 해도 자주 듣는 곡이나 거리를 들을 때 듣는 곳이 웬만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 편이다. 듣고 감동하는 음악도 가치 있다. 분명 가슴에 큰 울림을 주는 순간들에 음악이라는 요소는 크게 개입한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개인적으로는 고요히 생각에 잠길 수 있고 사색과 관조의 시간을 보내는 시간에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두는 듯하다. 이러한 사유로 클래식 음악의 가치란 거기서 발현된다는 저자의 생각에 경험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은 영화음악가 한스 짐머의 열렬한 팬이라 한스 짐머의 음악이라면 단 몇 초만 듣고도 바로 알아챈다.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유명한 테마는 당연하고 〈다크나이트〉 시리즈나 〈인셉션〉, 〈인터스텔라〉 같은 최근 대작부터 내가 두 살 때 나온 〈레인 맨〉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이걸 몰라?” 하는 빈정거림을 조금 참고 견디기만 하면 이 선율은 어떤 장면에서 쓰인 것이고, 이 변주는 어떤 인물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행동을 해서 시작된 거라는 설명을 막힘없이 들을 수 있다. - 아무튼, 클래식 中
음악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특정 테마음악이 어느 장면에 쓰이는지에 대해서, 특정 변주는 인물의 어떤 감정을 표현해 내며 어떤 상황적 맥락에서 쓰일 수 있는지 다 꿰뚫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어 신기했던 문장.
필자가 생각하기에, 작곡에 있어서도 사용할 수 있는 악기가 많아졌다는 것은 특정 상황에 대하여 훨씬 풍부하고 많은 가짓수의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는 것이기에 큰 메리트라 여겨진다. 이것이 현대 음악의 장점이지 않을까. 고전 악기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현대 음악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시대.
클래식 음악은 바흐에서 시작해 말러에서 끝나는, 죽은 작곡가들의 예술로 여겨지곤 한다. 음악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클래식 음악의 요소가 재즈나 영화음악, 펑크나 록 등 대중음악으로 이어진 사례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음악’이란 말러와 할리우드 영화음악 사이를 메우는 소수의 사람만이 즐기는 하나의 음악 사조다. - 아무튼, 클래식 中
젊은 ‘클래식’ 작곡가들은 ‘현대음악’의 어법에 따라 음, 음향의 서사 혹은 효과를 고민한다. 난해하고 불친절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음악의 세계이기도 하다.- 아무튼, 클래식 中
2021년 현재, 유튜브에는 클래식과 현대 음악에서 쓰이는 요소들을 섞어놓은 음악을 창조하는 아티스트가 근 5년 내에 매우 많이 늘었다. 이루마님은 본인의 음악을 '세미클래식'이라 칭하라고 했던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세미클래식을 매우 좋아한다. 고전 클래식은 잔잔하게 흐르는 하나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느낌이라면, 세미클래식은 대개 3~4분 내외로 하이라이팅 부분이 명확하고, 청자의 입장에서 예측이 명확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으며, 소위 '대중음악'이라 불리는 어법을 많이 적용했다는 느낌이 든다.
가령, 피아노 선율에 비트 소리를 삽입하는 경우 훨씬 생동감 있어지는 음악이 된다. 근 5년 내에 이런 류의 피아노 음악이 상당히 인지도와 인기를 얻고 있는 듯하다.
어느 한 세계에서는 이렇게 고전 클래식과 현대음악의 요소를 접목시켜 대중들의 귀를 사로잡는 반면, 다른 세계에서는 고전 클래식과는 아예 동떨어진 방향으로, 새롭게 창조된 음악만으로 구축되는 세계가 있다. 가령 edm도 한 예시라 볼 수 있다. '현대 음악'에 너무 익숙해진 대중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고전 음악', '고전 클래식'을 죽은 음악으로 치부할 위험성도 있으며,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 클래식이라는 장르가 나아가야 할 바, 또한 어떻게 새롭게 재창조될 수 있을지에 대하여 논의와 고찰이 필요로 될 것이라 예측한다.
예술은 어느 시대를 딛고 살아가는 예술가의 기질, 감각, 감수성 같은 것들로부터 토해진다. 그것이 단 몇 명의 관객에게만 가닿는다고 해도, 그저 기록물처럼 후대에 전해지기만 한 대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술의 가치란 그 시도 자체에 있기도 하고 또 그 평가가 각기 다른 때에 완결되기도 하니 말이다. 듣는 행위의 자유를 누리게 한다는 점, 능동적 발견의 기쁨을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동시대 음악을 즐길 이유는 충분하다. 그렇기에 나는 자꾸만 새로 태어나는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아무튼, 클래식 中
새벽에 누웠을 때 밀리의 서재로 조금조금씩 보던 <아무튼, 클래식>. 웬만하면 정보 집약적, 정보 전달적 성향을 띤 서적만 읽던 필자의 예술적 감성을 다시 상기시킨 서적이다. 필자도 클래식을 좋아하고, 음악을 감상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런 순간순간을 내가 아닌 다른 타인이 그 감정을 글로 풀어서 쓴 작품을 읽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라 생각한다.
읽는 내내 저자와 느끼는 감정과 사유가 일치된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다분히 매력적인 글이다.
고독은 공포하는 순간 고유성을 잃는다. 이제는 누구도 고독하기가 참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려진 고독의 틈에서 예술의 언어가 피어나고 종이 위에는 시가 쓰인다. 고독할 용기를 점점 잃어가는 나는 바흐와 굴드의 고독에 기대 애처로움 같은 것들을 더듬어 느낀다.
음악 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건 역시 예술가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녹음기를 들이밀면서 자, 저는 당신 이야기를 글로 써서 세상에 널리 전할 겁니다 하는 기자 앞에서 말을 고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전부라고는 할 수 없어도 일하면서 만난 예술가 대부분이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한 곧은 태도를 분명하게 전달할 줄 알았다. 조리 있게 논리적으로 말하는 데는 서툴더라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예술가가 지닐만 한 삶의 뭉툭한 부분과 뾰족한 부분을 구분하고 인정할 줄 알았다. 자신감과 자만, 겸손함과 졸렬함을 헷갈리지 않는 성숙한 사람들이었다.
예술을 잘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음악을 공부하고 또 음악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내내 꾸준히 품어온 또 다른 질문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미친 듯이 창작에만 몰두하는 쪽도, 재능만 믿고 게으름이나 배짱만 부리는 쪽도 정답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한 손에는 맑고 깨끗한 정신, 다른 한 손에는 세상 속 고통, 절망을 똑같이 나눠 들고, 스스로를 망치지 않을 만큼 노력하면서 군중의 무관심이나 비판에 상처받지 않을 만큼 단단한 정신력을 다져야만 잘할 수 있는 일이다. 너무 어려운 거 아닌가!
피아노는 독주 악기로 완벽하다. 듣고 싶은 어떤 이야기도 다 들려줄 능력이 있다. 바흐의 절제된 노래를 들려줄 수도 있고 슈만이 그린 유약하고도 아름다운 그림도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다. 쇼팽의 기품 있는 유려한 흐름에 하염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것도, 리스트나 라흐마니노프의 스펙터클을 만끽하게 하는 것도 전부 피아노가 하는 일이다.
그림을 잘 그릴 줄 안다면 스케치해두고 싶은 장면들이 있다.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의 표정. 청중의 지적 만족을 끌어올리는 심도 있는 연주를 들려주고는 어진 선비처럼 웃어 보이던 커튼콜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뒷모습. 이성과 감성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황홀한 연주를 선보인 후 미련 없이 무대를 떠나던 모습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