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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하는 개발자 Jun 04. 2022

몽카페

프랑스 파리의 카페 유영하기


저자에게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가 되어 어딜 가든 늘 그의 곁에 남았다-. 언젠가 나도 파리의 거리를 유영하고 싶다는 작은 염원을 지니게 한다.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시절'의 상징을 지녔던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의 흔적을 찾기 위하여.


어쩌면 저자의 말대로 '봤다', '마셨다', '먹었다', '생각했다'가 많은 여행 에세이의 전부라 할지라도, 그러한 모든 잠시 멈춘 시간을 담는 행위는 의미와 가치를 지닐 것이다. 꼭 관찰 일기 같은 블로그를 운영하거나 책 출간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시선'을 기록하는 그 순간이 예술에서의 숭고를 느끼는  찰나의 빛일 테니.



나의 몽카페


그는 그곳을 '몽 카페'(Mon cafe, 나의 카페)라 불렀다.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만의 카페, 자신만의 빵집, 자신만의 술집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 아, 프랑스인들은 그렇구나. 나의 카페, 나의 빵집, 나의 술집이 있구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도 그런 것을 만들어 볼까?-몽카페 63p



나의 카페가 되는 기준을 물었다. 자주 가면 '내 것'이 되는 것이냐고. 그는 자주 가는 곳, 나와 공간이 서로 자연스러운 곳이라고 대답했다. 자연스러운 곳, 내게 그런 곳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곳은 없다. 심지어 집도 아니다. 내게 집은 그냥 '집'일 뿐, '내 집'이란 말은 어쩐지 어색하다. 처음으로 '내 것'을 만들고 싶어졌다. 자신 있게 '내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을 갖고 싶어졌다. - 몽카페 63p



프랑스인들은 자신만의 카페, 자신만의 빵집, 자신만의 술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저자는 이제부터 자신도 그런 것을 만들어볼까? 하고 문득 호기심 어린 생각을 하게 되었나 보다. 나도 나만의 몽카페가 있다. 난 카페라는 공간을 참 사랑한다.  가만히 있을 때 매장 스피커에서 나오는 잔잔한 벨 에포크 시대의 클래식도, 현대식 인테리어 같으면서도 고풍스러운 색감의 르네상스 인테리어가 내 마음에 드는 그런 곳을 사랑한다. 



유현준 교수님의 유튜브 강의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강남의 테헤란로의 벤치의 개수는 뉴욕시의 벤치의 개수보다 현저히 적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실외에서 앉을 공간이 없다고. 그렇기에 현대인들은 음료를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닌 공간을 사기 위해 카페에서 소비를 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동의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카페라는 곳을 음료의 매력보다는 공간의 매력으로 바라보는 사람인 듯하다. 그렇기에 나의 몽카페는 음료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닌 공간이 기준이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몽카페(Mon cafe), 즉 나만의 숨 쉬듯 자주 드나들며 호흡하는 애정 하는 카페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다. 

첫 번째로 사람이 없을 것, (다르게 표현하면 장사가 잘 안돼야 한다는 말이니 사장님께 조금 죄송 ㅎ )

두 번째로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았을 때 시야에 탁 트일 정도로 주변 공간이 넓을 것.



한마디로 나는 넓고 한적하며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어디에 있는지 모를 스피커로부터 나오는 클래식 음악에 나름대로 도취할 수 있는 그런 카페를 사랑한다. 현재 내가 자주 드나드는 카페도 그런 곳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다양한 카페를 탐험하듯이 발을 담그며 드나든다기보다는 가장 만족스러운 어느 카페에 자연스레 정착하게 되는 것 같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언니들과 조금 안면이 트이고 아는 사이인 듯 아닌 듯 오늘도 항상 시키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드림을 주문하는 그 순간이 많이 익숙하고 소중한 것 같다.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가 되어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물 겁니다.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헤밍웨이의 말이다. 나는 젊은 시절을 파리에서 보냈고, 내가 파리의 카페에 앉아서 봤던 모든 풍경은 이제 '움직이는 축제'가 되어 내 안에 남았다. 



파리의 카페를 담은 글을 쓰며, 그 풍경들을 기록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내가 쓴 글 속에 행위라고 할 만한 것은 '봤다'와 '마셨다','먹었다','생각했다'가 전부인데, 그런 단순한 글이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얼마 전, 호숫가에서 새를 관찰하는 사람을 만나 그 두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새를 관찰하고, 새를 그리고, 새를 기록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조심스레 용도를 물었다. 어떤 기관의 연구 자료로 쓴다거나 관찰 일기 같은 블로그를 운영한다거나 책을 준비 중이라는 답변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는 내 질문에 그저 배시시 웃으며 특별한 용도는 없다고 했다. 새를 기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시선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냥 새를 보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던 그의 말이 내 안에 무엇인가를 흔들었다. - 몽카페 131p



저자에게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가 되어 어딜 가든 늘 그의 곁에 남았다-. 언젠가 나도 파리의 거리를 유영하고 싶다는 작은 염원을 지니게 한다.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시절'의 상징을 지녔던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의 흔적을 찾기 위하여.



어쩌면 저자의 말대로 '봤다', '마셨다', '먹었다', '생각했다'가 많은 여행 에세이의 전부라 할지라도, 그러한 모든 잠시 멈춘 시간을 담는 행위는 의미와 가치를 지닐 것이다. 꼭 관찰 일기 같은 블로그를 운영하거나 책 출간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시선'을 기록하는 그 순간이 예술에서의 숭고를 느끼는  찰나의 빛일 테니.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카페에 가고 싶다




무엇보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만큼은 세상과 부대끼지 않고 세상 속에 머물 수 있었다. 그러니 나는 그 정도의 거리가, 그 정도의 삶이 좋은 것 같다. 옆 테이블에 앉은 이의 온기를 느끼며, 옆 테이블로 넘어가지 않고 내 몫의 커피를 맛있게 마시는 삶.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카페에 가고 싶다.-몽카페 156p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그 짧은 시간만큼은 타인과 접촉을 하지 않고 몽상과 공상에 잠길 수 있다. 실내와 실외의 경계가 모호한 자리에 앉아 밖을 바라보면 나름의 해방감의 만끽과 동시에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애매하게 들어오는 맑은 햇빛도, 햇빛에 반사되어 유난히 파장을 발하는 맑은 사물의 색감도, 홀로 철학 서적 혹은 에세이를 읽을 수 있는 시간도, 주위에 아무도 없는 사색과 사유와 감상을 할 수 있는 긴 시간에게도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  저자분과 온전한 일체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지라도 마지막 문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몽마르트의 어느 카페에서


유치원 아이들이 꽃 한 송이씩 손에 쥐고 카페 앞을 지나간다. 선생님은 저기 멀리, 사크레쾨르를 향해 가고 있다. "마드무아젤,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흑인 남자아이 한 명이 내게 꽃을 내민다. 새까만 피부와 커다란 눈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보답의 의미로 가방 속에 있던 킨더 초콜릿을 아이에게 건네본다. 초콜릿을 받은 아이가 활짝 웃는다. 까만 얼굴에 하얀 치아가 반짝인다. 아이는 손에 초콜릿을 쥐고 선생님을 찾아 달린다. 햇빛이 좋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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