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 미술관 <영원한 것들: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 것들>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예술에서 시선이란 항상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세상과 사회, 그리고 개인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미의 기준이 결정되었고, '그것이 예술이냐, 아니냐.'의 범주를 결정지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미의 기준'에는 하나의 '이상향'이 존재했다. 무릇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정의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스 신전에 세워진 아름다운 얼굴과 환상적인 비율이 그러한 '미의 기준'이었고, 중세 시대로 넘어가면 신의 교리에 따른 종교적 관점의 미의 기준이, 이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어서 인간 중심으로 사고가 전환되었을지라도 명암과 또렷한 인체 표현이 미의 기준이 되었다. 명확한 '이상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이상적인 미'가 과연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세상이 정한 아름다움이 '미의 기준'으로 정의 내려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모든 예술은 '이상향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철학자 질 드뢰즈는 아니라고 말한다. 세상이 정해놓은 아름다움의 기준, 이상향은 결코 도달할 수 없으며, 인간은 계속해서 절망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상향과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존재는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천편일률적인 기준으로 묶어두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수많은 차이가 오히려 존재의 잠재성을 발현시키게 한다. 노년의 화가 김환기는 질 드뢰즈가 이러한 주장을 펼쳤을 시기에 화폭 안에 수많은 차이를 가진 점들을 그렸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 것들.
삶의 즐거움이여 아름다움을 바라고 의식하는 진실로 사람됨이여.
정의 내리고 평론하는 게 아니라 논하는 게 아니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커다란 화폭에 반복되는 무수한 점들. 점들은 같은 듯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명암의 차이, 모양의 차이, 채도의 차이. 자세히 관찰해야지만 알 수 있는 차이가 제각기 다른 개성을 뿜고 있는 것이다. 파형처럼 동그란 원을 그리며 반복되고 있는 점은 마치 지구와 우주를 상징하는 것 같고, 평면에 끝없이 전개되는 점과 그 사이를 가르는 흰색 선은 이것이 바다와 대지와 하늘같다. 점과 선과 면들은 어떠한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본 꽃과 내일 본 꽃이 다르듯이, 꽃들을 가까이에서 보면 하나하나가 다르듯이, 스스로 차이와 반복 속에서 존재하는 자연 그대로인 것이다.
'영원한 것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 것들'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번 전시에서는, 김환기가 사물을 대할 때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중점으로 전시를 이어나갔다. 1층에 배치된 김환기 화백의 커다란 화폭들 중에서 눈에 띈 건, 신라시대 불상 뒤에 놓인 노란빛 추상화였다. 멀리서 보면 명암의 대비 덕분에 자로 앞에 놓인 불상의 미소가 착시현장처럼 또렷하게 보인다.
얼굴에 떠돌고 있는 불가사의한 미소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지금도 신라 천년의 웃음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언젠가는 이 얼굴에 대해서 평화의 미를 써야 할 책임감을 느끼고 있지만, 이 예술의 조그만 파편이 이토록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 것
이번 전시에서 단연 백미는 3층에 전시된 커다란 추상화들의 향연이었다. 4m 정도 되는 커다란 화폭에 새겨진 추상화들은 제각각 변주를 담고 있었다. 왼쪽 벽면에 걸린 추상화는 파랑, 갈색, 파랑으로 이어져 마치 바다와 대지 하늘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세상을 그린 것 같은 장엄함도 느낄 수 있었다. 정면에 배치된 추상화에는 점이 하나의 푸른 면을 만들면 그 사이를 흰색 줄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치 도시를 계획하여 길을 만들고, 땅을 개간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투명한 거미줄 뒤로 파란 하늘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하였다. 푸른 점과 면 사이를 가로지르는 흰색 선이 생명의 의지로 만들어진 여러 갈래의 길처럼 보였다.
시선을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면 강렬한 푸름과 붉음을 볼 수 있다. 이 화폭에는 오직 점들만 있다. 파란 점으로 무수히 채워진 화폭과 붉은 점으로 채워진 화폭. 이 화폭은 1.5m 정도 떨어져서 볼 때 아름다움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점들의 명암이 모두 달라 멀리서 보면 마치 푸른색 물빛이 아른거리는 것처럼, 붉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두 화폭을 교차해서 보고 있으면 저마다 다른 생명의 불꽃이 움직인다. 또는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창밖으로 거대한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대동여지도에 그려진 검은 산맥들처럼, 추상화에 새겨진 짙은 명암이 산줄기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물결처럼 느껴졌다.
추상화 안에 담긴 거대한 생명력과 더불어 이번 전시에서는 화가가 작품의 주제에 따라 다방면으로 방법을 고심했다는 게 느껴졌던 전시였다. 같은 유화 그림이어도 어떤 작품은 마치 한지에 서서히 먹이 드는 것처럼 표현을 하고 어떤 것은 한지가 풀을 먹어 문지방에 붙여지듯이 두껍고 질감 있게 표현하였다.
존재란 그런 것일 테다. 사람 개개인도 차이로 인해 존재하듯이, 차이는 마땅히 태어나면서 지닌 특징이다. 이 본래의 특징이 이상향과 거대한 차이를 만든다고 하여 절망할 필요 없다. 오히려 이 차이로 인해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살아가는 것일 테니.
그림을 그리는 시간 외에는 그림을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 생각하는 그림은 대개가 작품과는 딴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새 화포 앞에 선다. 새 화포 앞에 사면 그냥 그림이 시작된다. 제작하며 생각하는 생각이 결국 그림을 만들게 된다.
미술가는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내기 전에 아름다운 것을 알아내야 한다.
미술가는 눈으로 산다. 우리들은 눈을 가졌으되 만물을 정확히 보고 있는 것일까.
달이 가듯이 항아리도 가고
넓은 하늘에 꼭 차있는 항아리
항아리 속에 달이 있어 우리는 늘 보름달에 살아왔고
꽃도 탐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