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미키 17>
한 남자가 우주선 밖으로 나가 시스템 기기를 살펴본다. 노란 선과 빨간 선을 뒤적이던 그는 시스템이 말짱한 것을 보고 무선을 때린다. "이거 멀쩡한 거 같은데? 이상 없는데?" 그러자 무선 전화를 받고 있던 시스템 팀이 "사실은 미키" 하면서 입을 뗀다. "시스템 장비에는 이상이 없고, 이건 미키 네가 방사능을 쬐었을 때 얼마나 빠른 시간에 목숨을 잃는지 테스트하기 위한 실험이야. 그래서 그런데, 장갑 좀 벗어줄래? 피부에 얼마나 빠르게 물집이 잡히는지 확인 좀 해보고 싶어서 말이야." 실험 쥐와 같은 취급에도 미키는 이해한다며 입고 있던 방호복을 벗는다. 사람임에도 사람 취급을 받지 않는 자. 미키가 이런 취급을 받는 이유는 그가 '익스펜더블'이기 때문이다. 그는 죽더라도 3D 프린트 같은 기계에서 다시 살아난다. 닭고기, 오물,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 미키와 똑같이 생긴 유기물을 만들고 거기에 이전 미키가 가지고 있었던 기억을 그대로 집어넣는다. 그럼 이전까지 기억을 가지고 있던 미키로 똑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기술이지만, 새로운 행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 우주선에서 유일하게 미키만이 허락받아 되살아난다. 그는 인류를 위한 새 개척자이므로, 그의 수많은 죽음이 인류를 새로운 세상으로 내딛게 할 것이고 살아남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은 원작 소설 <미키 7>에서 이 재미난 설정을 끌고 와 <미키 17> 영화를 제작하였다. 무려 5년 만에 신작을 내보인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는 여전히 재밌고, 예측할 수 없고, 때론 잔인하지만, 울림이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여기서 예상치 못했던 것은 '사랑'이 영화 전반에 걸쳐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역시 봉준호 감독님 이전 작품들처럼 냉철한 시선으로 모순을 꼬집는 영화이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었다. 미키의 존엄에 대한 윤리적 문제도, 과연 누가 '나'인가 하는 철학적 물음도, 인간과 외계 생명체의 공존에 대한 환경과 사회에 대한 문제도 모두 사랑이라는 커다란 주제 아래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인터뷰에서도 "이렇게 사랑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처음이다."라고 말씀하셨던 만큼, 이번 영화는 정말 '사랑'을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성공했다. 이토록 재밌으면서 다이내믹하고 동시에 여운 깊은 사랑 이야기가 있다니.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너무 즐거운 영화이니 간략하게(?) 리뷰글을 써보고자 한다.
영화는 두 사람의 미키가 탄생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위험 임무에 가담했지만 살아 돌아온 미키 17, 하지만 미키 17이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은 미키 18을 만들고 만다. 자신의 방에서 미키 18을 마주한 미키 17은 '멀티플'이 발생하면 우리는 영영 죽는 거라며 한 사람만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서로를 죽이기 위한 혈투가 벌어진다. 미키의 경우처럼 두 사람이 발생하면 범죄에 이용될 수 있기에 그의 기억을 영원히 지우고, 절대로 다시 복제할 수 없게 만들어 법적으로 그 사람을 즉시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있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나샤에게 사실이 발각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멀티플이란 것을 사람들에게 숨기며 살아가기로 한다. 그럼 여기서 '진짜 미키는 누구인가.', 찌질하지만 선량한 미키 17? 아니면 생각하는 즉시 행동하고, 감정을 분출하는 미키 18? 여기서 우리는 오랜 철학적 물음을 마주하게 된다. 나와 똑같은 외형과 기억을 가진 유기체가 '나'라고 주장할 때, '나는 누구일까?'
미키 17과 미키 18의 성격을 보면 완전히 다르다. 미키 17은 불안함이 크고, 두려움이 많다. 하지만 정이 많고 선량하며, 때로는 이 선량함이 아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친구 티모에게 언제나 끌려다니고, 횡포를 부린 독재자 마샬에게 저녁에 초대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바보 같은 말을 건넨다. 반면 미키 18은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미키 17이 당한 부당함을 들었을 때 "너 바보냐?"라면서 소리를 지르고, 자신을 이용하는 티모와 마샬을 죽이려고 한다. 미키 17의 반대편에 있는 안티 태제인 것이다. 성격이 이토록 다르지만 둘은 똑같이 아냐를 사랑하고, 똑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또 하나의 페르소나인 것처럼, 미키 18은 미키 17의 공격자이기도 하지만, 동료이자, 친구이다.
우리도 때로는 예기치 못한 나와 닮은 쌍둥이가 나타나서
평생 혼자서 산 줄 알았더니
자기랑 똑같은 누군가가
내 방 장롱 속에서 튀어나와서
나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하고 싶었지만 못 했던 말을
나의 쌍둥이가 대신해 주고
그런 충동을 느낄 때가 있잖아요.
그걸 보여주거든요.
두 미키의 관계, 또 미키와 미키.
우리도 한 번쯤 품어 봤을 법한 이상한 상상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어요.
'두 명의 나'라는 것이.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모두가 다르다고 할 때 미키를 사랑하는 나샤만이 두 사람이 모두 미키라고 말한다. 심지어 "미키 18은 네가 가져. 나는 미키 17을 가질게."라고 말하는 동료 카이에게 화를 내며 "두 사람은 다 미키야. 두 사람은 다 내 거야."라고 화를 내는 나샤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무리 두 사람이 성격이 다를지 언정,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의 페르소나를 지닌 미키일 뿐, 그 자체는 변함없다는 것이다. 이는 봉준호 감독이 왜 하필 17이고 18이냐라는 질문에서 "사람이 17세에서 18세로 넘어갈 때,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잖아요. 그걸 표현하고 싶었어요."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순수했던 십 대가 지나 성인이 되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벽 너머 세상을 알게 된다. 새로움 혹은 두려움을 알게 되면서 점차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어찌 보면 17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시절의 인간이다. 반면 18은 세상에 온갖 쓴맛을 다 맛본 사람처럼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두 모습 모두 '나'이다. 나의 순수한 모습도, 때론 냉정하고 시니컬한 모습도. 다른 페르소나일 뿐, 결국 '나'이자 '미키'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명제는 '존엄과 사랑'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그 어떤 모습으로도 '나'이기에 미키의 그 어떤 죽음도 소중한 것이다. 나샤는 그렇기에 모든 미키의 죽음에 슬퍼한다. 미키 1이 죽었을 때도, 미키 3, 미키 10, 미키 16, 다른 사람들은 미키를 실험용 쥐처럼 생각하며 '넌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존재야.'라고 말하고 '죽을 때 어떤 기분이야?'라고 묻지만 나샤만큼은 미키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각각의 미키들의 죽음은 모두 다르기에 '죽을 때 어떤 기분이야?'라는 질문 자체가 난센스인 것이다. 각각의 생명은 모두 다르고 고결하기에. 이는 인류가 행성에서 만난 크리처를 통해서도 마주하게 된다. 크리처 종족의 모체는 작은 새끼 하나가 인류에게 잡혀간 것만으로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모든 크리처들을 집결시킨다. 협상을 하기 위해 통역기를 단 미키에게 "소중하다. 만약 우주선에 있는 '조코'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인류를 멸망시키겠다고'선포한다. 모든 생명체는 고귀하다. 생명에는 작고 크고,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것을 나샤의 행동을 통해, 마마 크리퍼의 입을 통해 명시되는 것이다.
최후에 미키 18은 죽고, 17은 살아남는다. 왜 미키 17일까. 능력 면에서 보면 정확하게 행동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적은 말살하려고 하는 미키 18이 우수해 보이는데, 왜 미키 18은 자신을 희생하고 17일 살린 걸까. 왜 영화는 17을 선택한 걸까. 그 이유에 대해 미키 역할을 맡은 로버트 패틴슨은 이런 답을 내놓았다.
사실 평범한 사람 관점에서 보면 미키의 삶이라는 건 지옥이나 다름없잖아요. 끊임없이 죽고, 사는 상태에 갇혀 있으니까요. 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최악의 상황들이 그에게는 일상이니. 그런데도 미키는 이런 식이에요. 그러든가, 말든가. 근데 주위 사람들은 모두 미키에게 이렇게 말해요."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돼? 넌 대체 왜 그 모양이야?"하지만 미키에겐 영웅적인 면이 있어요. 본인은 깨닫지 못하지만. 제가 볼 때 미키는 뭐랄까, 자신의 그런 삶마저 사랑한다고 할까요? 비록 매번 죽을 때마다 다시 프린트되지만, 그럼에도 나샤를 사랑하고, 자기 삶을 사랑하고, 이런 삶이라 해도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해요. 살아남고 싶다고.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감정은 뒷전으로 미루죠. 그래야 생존할 수 있으니까요. 영화를 보고 관객을 알게 돼요. 미키 17이 그렇게 오래 살아남았던 건 그런 그의 성격과 그가 내린 결정 덕분이었다는 걸요. 미키의 유머러스함을 연기하면서 그게 이 인물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런 처지에서 웃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건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으니까요.
로버트 패틴슨의 답변처럼 미키 17이 살아남은 이유는 다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인류와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 나샤를 향한 믿음,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 세상을 사랑해 보고자 하는 마음 덕분에 그는 최후에 살아남았다. 사랑이라는 소재를 이렇게 다각도로 표현한 영화가 얼마 만인지 너무 재밌었다. 인간과 인간의 사랑, 나 자신을 향한 사랑, 세상에 대한 사랑, 인류와 비인류에 대한 사랑, 전반적으로 사랑에 대해 내세운 영화이기에 참으로 애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