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7
큰 이모부가 눈이 휘어지도록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채미 왔냐. 다들 왔네. 얼마 만이냐. 잘 왔다." 큰 이모부 팔순 잔치에 오랜만에 외가댁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나와 항렬은 같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척 오빠들과 언니도 내 볼을 꼬집으며 "네가 벌써 서른이 넘었다고?"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나와 키가 비슷했던 조카들도 어느새 대학생이 되어 내 키를 훌쩍 뛰어넘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집안 어르신들은 아이들 손을 맞잡으며 "네가 이렇게 컸냐, 네 동생도 이만큼 컸네. 애들이 벌써 이렇게 컸어."라며 이리저리 훑어보고 계셨다. 우리 가족은 손을 붙드는 어르신들 한 분 한 분에게 인사를 하며 서로 부둥켜 안기도 하고, 손을 매만지기도 하며 오래도록 서 있다 자리를 잡았다.
"네 큰 이모부 매일 아프다 그러시더니 기어코 팔순 잔치까지 하시네. 큰 이모 봐봐. 저렇게 꾸며놓으니 얼마나 이뻐. 그래도 아들들이랑 며느리가 이런 잔치도 만들어주니 사람들도 모이고 얼마나 좋아." 엄마는 내 옆에서 연신 눈물을 글썽이며 큰 이모부와 큰 이모가 무대 앞에서 반지를 주고받는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뒤이어 오빠들이 편지를 낭송하다 코를 훌쩍거리자 모두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온 식구가 모인건 거진 10년 만인 듯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도통 가족들이 모일 일이 없었다. 내가 테이블에 앉아 조카들과 식구들을 둘러보는데 친척 언니가 내 팔을 쿡 찔렀다. 대학생과 중학생 아들을 키운 관록쌓인 어머니가 된 언니는 “네가 벌써 직장인 9년 차라고? 몇 살이더라? 나랑 띠동갑이니까, 벌써 서른이 넘었어? 어머나." 하며 계속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이야기만 벌써 열 번은 넘게 듣는 것 같아." 내가 민망해서 얼굴을 붉히자 반대편에 앉은 다른 친척 언니가 "우리만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니까. 다 나이 먹는 거지. 어른들은 다 똑같은 거야. 우리 기억엔 아직도 네가 무릎까지만 오는 꼬맹이니까."라며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MC가 준비한 행사가 모두 끝나자 언니와 오빠들, 이모부들과 이모들, 집안 어르신들까지 모두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그간 못다 한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모두가 똑같이 휘어진 눈웃음을 지으며 소주를 한 잔 걸치는 모습을 보고 참 닮았다, 흙내음 풍기는 저 순박함들이 참 닮았다며 속으로 한참 웃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흐른 걸까. 오빠랑 언니들도 내 나이였던 적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 사십 대 중후반, 오십이 되어도 나를 놀리던 개구쟁이 같은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오빠 하나는 "항렬이 같은데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나야지. 내가 네 엄마랑 나이 차이가 더 적게 난다. 오빠란 말을 얼마 만에 듣나 몰라."라며 손을 내저었다. 머리가 희끗해지고 아저씨가 다 되었지만 여전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들을 대할 때 장난스러운 웃음을 숨기지 못하면서 말이다.
다섯 살, 네 살 조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뛰어다니고, 어르신들은 얼큰하게 술을 한 잔 걸치고, 언니들과 오빠들은 수다를 떨고, 나도 내 또래 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소란스러움을 보냈다. 언니 오빠들의 볼 꼬집과 어르신들이 토닥거림이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나는 벌건 얼굴로 실없이 계속 웃었다. 명절날 모이면 건넨다는 그 흔한 잔소리 하나 없이 모든 어르신들은 건강만 하라며 내 어깨를 두드리고 하나 둘 자리를 떴다.
"엄마 우리 가족은 다 눈이 이렇게 휜 것 같아. 하회탈처럼. 엄마도 그렇고 이모들도, 언니도 그렇고, 가만 보면 형부랑 이모부들까지 다 눈이 휘었다? 우리 가족도 그렇잖아. 가족이라 닮는 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말을 꺼내자 엄마는 "그러게. 듣고 보니 다 웃을 때 눈이 휘어지네."라며 웃었다. 그리고 참 다들 정정하시다고. 큰 이모부도 팔순인데 정정하시고, 집안 어르신들도 연세가 많으신데 다들 정정하셔서 다행이라며 엄마는 큰 이모부가 건네준 다과와 수건 더미를 꼭 쥐었다.
우리 가족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집집마다의 속사정도, 그간의 역사들도 모두 알기에 용케도 다들 잘 살아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 살아진다. 나는 창밖에 비친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엄마에게 슬쩍 몸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