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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방과 홍콩의 밤

2025.03.31

by 김채미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니 문 앞에서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었다. 커다란 맨션에 7명이 들어가면 정원이 초과되었다며 삐소리를 울리는 엘리베이터는 너무 작았다. 사람들과 부딪칠까 어깨를 움츠리며 요리조리 빠져나가는데 곳곳에서 인도어와 아랍어가 들렸다. 터번을 쓴 사람들이 먹음직스러운 카레 사진이 박힌 전단지를 나눠주기도 하고 열대 과일과 주스를 들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션으로 올라가려는 여행객들과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이 뒤섞여 사람들 사이의 간격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간신히 복도를 빠져나와 출입구를 나오자 4차선 도로와 거대한 횡단보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빵빵거리며 경적을 울리는 이층 버스와 택시들도 간격을 매우 좁힌 채 운전을 하고 있었다. 택시를 잡고 짐을 싣는 사람들, 그 뒤에서 왜 택시를 이곳에 멈춰 서냐며 창문을 열고 화를 내는 운전자들까지. 이곳도 맨션과 다름없이 사람들이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짜부라져 홍콩에서 가장 번잡한 곳 중 하나라는 침사추이 한복판에서 기진맥진한 채 서 있었다.

도시 국가의 인구 밀집도는 이 정도구나. 여백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가든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풀린 눈으로 건너편에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빨간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내가 움직이는 건지, 사람 물결에 휩쓸리는 건지 모른 채 내 앞에 걸어가는 사람 뒷모습을 바라보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숙소에 돌아와 편의점에서 산 우유를 들이마시고 핸드폰에 찍힌 걸음수를 바라보니 이만 오천보를 넘기고 있었다. 그럼 얼마나 걸은 거더라. 어플에 들어가서 수치를 눌러보니 16km라며 가파르게 올라간 그래표가 떴다. 많이도 걸었구나. 나는 양말을 벗어던지고 엄마가 캐리어에 넣어 준 휴족시간 파스를 뜯어 종아리에 하나씩 붙였다. 침대에 털썩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의 간격도 참 좁았다. 20인치인 내 캐리어가 세 번 정도 뒤집히면 가득 찰 정도였다. 빽빽하고 소란스러웠던 거리만큼 숙소의 간격도 좁았다. 그렇다고 아늑하지 않거나 불편한 건 아니었다. 십 년 전에 친구와 유럽 배낭여행을 했을 때 호스텔에서도 눈을 붙이면 잠은 잘만 잤으니까. 그런데 어쩐지 이불을 자꾸만 뒤집어쓰고, 옷을 두어 개 껴입을 만큼 추위가 느껴졌다. 밖은 26도인데도. 한꺼번에 몰려들었던 인파 열기가 갑자기 사라져서 그런가. 방은 무척 좁고 작았는데도 한기가 느껴졌다.


잠들기 전, 문득 생각해 보니 나는 완전히 홀로였던 적이 없었다는 생각을 했다. 여태 자취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홀로라고 해봤자 부산으로 장기 출장을 갔을 때, 홀로 여행을 떠날 때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이 있었고, 출장에서도 고작 몇 시간 숙소에서 잠을 청했을 뿐 그새 회사 동료들과 함께 일을 하고 붙어 지내야 했기에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내가 독립된 공간에서 홀로 시간을 보낸 적이 극히 드물었다. 그랬기에 내가 느낀 잠깐의 고독과 물리적으로 홀로 고독감을 느낀 이와의 깊이에 차이가 있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원하는 이들도 분명 많지만, 그 시간이 계속된다면 보이지 않는 고독과 외로움의 깊이는 끝없이 깊어지지 않을까. 모든 생물은 결국 온기를 찾아 돌아다니니 말이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분이 넘치는 활력과 열기를 만났는데 집에 돌아왔을 때 고요함과 정적감만 감돌고 있다면, 반작용에서 오는 고독이 때때로 더 깊숙하게 덮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고갯짓 한 번이면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데 복도에서 새로운 여행객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캐리어가 끌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리더니 쪼르륵하며 정수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복도 중앙에 마련된 다과 테이블에서 과자와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실 모양인 듯했다. 한동안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복도를 지나가는 또 다른 여행객에게 "하이"라며 인사를 건네는 소리도 들렸다. 이상하게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자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제 구입한 인형을 내 머리맡에 올려두고 방 안에 불을 껐다. 다양한 언어들이 뒤섞인 복도의 울림을 들으며 나는 깊이, 아주 깊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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