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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상실의 시대

2025.03.17

by 김채미


세기 말과는 다른 상실이 우리를 덮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세기 막바지에 사람들이 겪었던 상실은 허무에 가까웠다. 한 세기가 끝나감에 따라 다가온 미지의 세기에 대한 두려움, 혼란, 공포감, 그리고 이에 따른 세계주의적 허망함이 지구를 덮쳤다.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격동적으로 변해가고 변해갈 것인데 지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20세가 초 전 인류적으로 일어났던 세계대전에 대한 과오를 씻고 발돋움할 수 있을까. 거대한 희망과 불안이 뒤엉켜 허무주의에 대한 공허함이 지구 한 편을 감쌌다. 그랬다면 21세기인 지금은 어떤 상실이 우리를 뒤덮고 있는 걸까.


분명 20세기의 불안을 덮을 만큼 과학 기술을 발전했고, 그만큼 우리는 더 전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 지역 내에서 사람을 사귈 뿐 아니라 전지구에서 친구를 사귀고 수백 명, 수천 명과 이어져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 AI의 발전으로 온갖 지식을 섭렵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는 길거리에서 친구와 카톡을 주고받고, 전화를 주고받고, 영상을 보고, 온갖 지식을 얻고, 업무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효율적, 혁신적, 편리성이 가두 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왜, 더 상실을 경험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목숨을 버리고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 20세기 불안함을 제거할 만한 놀랍도록 풍요로운 세상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이건 교묘한 착각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물질적, 기술적 풍요'아래에서 '정신적인 것마저 풍요롭게 되었다'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과 산업의 발전은 결코 정신적 풍요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사람과 이어져 있음에도 그 어느 시대보다 고립되어 있다고 느낀다. 수많은 사람과 연결된 탓에 오히려 한 사람, 한 사람 간의 유대는 옅어진 것이다. 우리는 SNS가 무분별하게 쏟아내는 정보 속에서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 사람이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행복해하는지, 무엇을 싫어하고, 어떤 삶을 원하는지 직접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그저 단편적인 조각들로 타인을 판별할 뿐, 그렇다고 그의 삶을 들어볼 여유는 없는 것이다. 바로 다음에 업데이트된 또 다른 이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었을 때, 깊은 상실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 사람을 알고 있다고 단언했지만, 사실을 고작 일부만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 나와 진정으로 이어진 사람, 타인과 내 진정한 삶을 나눈 사람을 셈해 보았을 때 몇 손가락 꼽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혼란과 아이러니가 새로운 시대의 상실감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SNS상에 팔로우된 수천만, 수백만의 팔로우 수가 허상이라는 것이 이 아이러니함을 더 증폭시킨다. 매트릭스 속 가상 현실 같은 달콤한 숫자와 이미지 속에서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지 파헤쳐야 하지 않을까. 진정으로 삶을 살게 하는 것. 그건 결코 숫자와 이미지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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