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3
S오빠가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며 청첩장을 나누어 주었다. "우리 H에게 한 장, D랑, T에게도 한 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챔 대장!" 청첩장을 하나씩 손에 쥔 우리는 감탄을 하며 서둘러 열어보았다. 청첩장 안에는 멋들어지게 정장을 차려입은 S오빠와 12년 동안 행복한 추억을 쌓은 아름다운 신부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형, 드디어 하네요. 참 시간 빨리 간다. 저 먼저 갔으니 어서 오라구요." 2년 전에 결혼을 하고 벌써 딸아이까지 있는 아빠 T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소름 돋는 게 뭔지 알아? 우리는 13년 만났다." 조용히 D가 말을 꺼내자 우리는 벌써 인연이 그렇게 됐냐며, 다시 한 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말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꽃피웠다. 결혼 준비는 어떠냐, 이번에 이사는 괜찮았냐,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냐, 제가 노하우 알려 드릴까요, 다음에는 누가 갈래,라는 말과 함께 정신없이 안주를 먹으니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가 있었다. 우리는 눈치를 살피며 "다음 2차는 카페로?"라는 말과 함께 외투를 집었다.
저녁 9시를 향해가고 있어서인지 카페 안은 한산했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그래도 영등포는 괜찮다. 차 타고 1시간 정도 걸리니까. 지난번에 부천에서 만났을 땐 죽는 줄 알았어." 하남시에 사는 T가 너스레를 떨며 시계를 가리켰다. 다음번에는 S오빠 결혼식장에서 만나는 거냐며 이야기가 이어지다 곧 요즘 일은 어떠냐는 이야기로 빠졌다. 점점 바빠진다는 이야기, 매번 똑같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지난번에 우연히 본 한 글에 대해 말을 꺼냈다. "내가 단톡방에 올린 글 있잖아, 공무원이 올린 글. 읽어 봤어? D도 동감해?" 그러자 D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엄청 공감 가더라. 다 그러거든. 그런데 요즘 다 그러지 않아? 공무원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내적 가치에 대해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S오빠도 입을 열었다. "내가 일로 어린아이들을 많이 만나잖아. 미팅도 하고. 오히려 애들은 미디어를 잘 사용하는 애들이 많다? 우리보다 앞선 세대니까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접했잖아. 그런데 오히려 어른들이 더 미디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도파민에 중독됐잖아. 나도 그렇고. 그래서 당장 앞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지. 가치라는 말이 너무 희귀해졌어."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일까. 코인, 주식, 투자, 부동산, 아파트의 가치를 논하는 요즘에 '내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말이 오히려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들린다. 그렇기에 한 사이트에 글을 올렸던 공무원도 '이해한다.'라는 문장으로 포문을 열었다. '낮은 임금에 많은 업무를 요구하는 버거운 세상에서 내적 가치를 생각해 보자는 말이 얼마나 난센스 한 지 자신도 잘 안다.'며 말이다. 그럼에도 '내 행동에 미래를 실을 수 없을까요?'라고 물었다. '5년, 10년을 바라보고 업무를 세워야 하는데 당장 앞의 일을 하기에도 버겁기에 대부분 프로젝트는 단기간에 끝나버린다고, 모두 눈앞에 성과만 급급하고 자기 역할이 아니게 되면 손을 떼버린다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좋지 않은 일이기에 안타깝다.'라며 적은 문장이 자꾸 생각났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지. 당연히 다 잘하고 싶은데, 여건이 안 되는 거잖아. 그러니 자꾸 단타나 코인에 몰리는 거고. 그 사람 말도 이해가 가는데, 사회가 이 모양인 게 씁쓸하다." T의 말에 내가 작게 한숨을 쉬자 S오빠가 핸드폰을 꺼냈다. "내가 전에 애들이랑 이야기한 내용인데 말이야, 아까 말했듯이 나는 이게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해.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는 것에 이미 몇몇은 싫증이 나거나 지쳐있을 걸.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래서 요즘 다시 독서가 붐이잖아요." H도 S오빠의 말에 동의한다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강제로 핸드폰 시간을 줄이고 공부에 집중하려고 모인 사람들이잖아. 그러다 보니 더 이런 생각을 하는데, 나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 언제나 반대하고 싶은 사람들이 등장하니 말이야." "정반합의 원리처럼." 내가 말을 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내용은 녹음해야 하는데, 팟 캐스트 감 아니었어? 하며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D가 참 좋았다며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을 회상했다. "회사에 있으면 맨날 아파트 이야기만 하잖아.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 요즘 어디를 주목해야 한다, 얼마 모았냐,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들만 하다가 우리끼리 모이면 내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라던지, 무슨 책을 읽었다던지, 그런 이야기를 해서 좋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참 드물잖아."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어떤 만화책을 봤는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떤 영상을 보았는지, 시시껄렁해 보여도 집으로 돌아갈 때는 마음이 충만한 이런 모임이 참 드물고 귀해서 고마움을 느낀다고. 일 년에 두어 번 계속 반복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