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시간이 지나면 새롭게 다가오는 책들이 있다. 이번에 두 번째로 읽은 안시연 시인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 그랬다. 2022년인가, 친구의 추천을 받아 처음으로 펴보았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은 그냥 그랬다. 시가 콕 와닿는 게 아니라 한 곳에서 다가와 한곳으로 흘러나갔다. 시를 오랜만에 읽어서 그런가, 친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란 생각과 함께 다시 친구에게 돌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흘러 친구들과 떠난 강화도 여행에서 한 책방을 방문했다. 마침 5월에 접어들기도 했고, 곧 여름이 다가오기에 안희연 시인의 시집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제 곧 다가올 '여름 언덕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서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다시 읽기 시작한 안희연 시인의 시집은 너무 색달랐다. 그때 내 마음을 물 흐르듯 관통했던 시들이 맞나? 내가 시를 해석하는 능력이 올라간 걸까? 아니면 3년 사이에 새로운 경험을 해서 단어와 구절들이 새롭게 다가왔던 걸까. 안희연 시인의 시집을 말 그대로 우리가 뜨거운 여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연루
당신에게는 사슴 한 마리가 있다 당시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사슴은 오래전 당신을 찾아왔고 당신 곁에서 죽을 것이다
사슴은 색이 없고 무게가 없지만 자주 붉은 사슴이 되고
며칠씩 사라졌다 돌아올 때가 많다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 같다
오늘도 사슴은 홀로 잡목 숲을 떠돌고 있었다 숲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렸고
이윽고 사슴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먼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쇠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곳에 무언가 있다는 듯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그 순간 당신은 비에 대한 낯선 기억 하나를 갖게 된다
소매엔 까닭 모를 흙이 묻어 있다
덫에 걸린 사슴의 발이 검게 썩어들어갈 때
당신은 수없이 지나다니던 방 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붉을 대로 붉어진 사슴이 절뚝이며 당신에게로 돌아올 때
당신은 수백 개의 신발이 강물에 떠내려오는 꿈을 꾼다
당신이 잠에서 깨어날 때 사슴은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아침 햇빛을 보면 자주 무릎이 꺾인다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안희연 시인의 시 속에서는 자연을 연상케하는 상징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사슴', '숲', '돌', '나무', '산토끼'. 시와 자연은 뗄 수 없는 존재이듯, 여러 시인의 시 속에서도 자연물은 언제고 등장하지만, 안희연 시인의 시 속에 등장하는 자연물들은 유독 꿈결에서 본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연루에 등장하는 '사슴'도 그러하다. 왜 색이 없는 사슴은 하필이면 붉은빛을 띠게 되는가, 사슴은 덫에 거려 눈물을 뚝뚝 흘리는가. 그리고 사슴이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에서 '사슴'은 내가 어렸을 적 품었던 동심, 혹은 순수, 희망, 열정 같은 것이 아닐까. 태초에 아무 색이 없었던 나의 순수는 삶의 여러 쓴맛을 보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내가 헤맬 때마다 사슴은 점점 붉은색이 되고 덫에 걸리고, 발이 검게 썩어들어간다. 동시에 나는 방 문턱에 걸려 넘어지며 사슴이 절뚝이는 것을 보게 된다. 어른이 된 지금 꿈속에서나마 나의 순수를 마주하고는 하지만 꿈에서 깨면 곧 잊어버리고 사라진다.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 아침 햇빛을 보며 안개처럼 어른거리는 사슴의 흔적을 느끼고,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미치는 게 아닐까.
1부, 2부, 3부, 총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번 시집에서 1부에 실린 이 시는 우리의 과거, 기억 그 자체를 보여주는 시들이 실려있다. 과거에 대한 후회, 좋지 않은 기억, 어쩌면 내가 과거에 두고 온 것들까지도. 나의 과거에 어떤 기억의 조각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본 다음 시인은 본격적으로 여름 언덕에 오를 준비를 한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 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 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 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시인은 2부에 이르러 여름 언덕에 오른다.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아마 화자의 바람인 동시에 현재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나를 잃어버리고 싶지만 현재는 완전히 잃어버리지 못하는 나의 정신과 육신 말이다. 우리가 종종 나를 잃어버리고 싶을 때, 모든 정신과 몸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라 하면 지치고 고된 순간을 의미할 것이다. 매일 같이 야근을 해서, 정신이 깎이는 듯한 상황을 마주해서, 그럴 때 나를 모두 놓아버리고 훨훨 날아가 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듦에 찌든 현재의 나를 잃어버리고 싶어 한다.
현실에 치인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나는 여름 언덕에 오른다. 맑은 나를 되찾기 위해 떠난 여정은 뜻밖에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현재의 나를 세밀하게 관찰하게 만든다. 여름이 주는 뜨거울 지열에 숨 막혀하는 나, 물웅덩이에 푹푹 빠져버린 나, 언덕은 그런 나에게 '흰토끼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 사이에 내가 잊어버린 흰토끼는 나의 어떤 바람이었을까. 여름이 주는 고난 속에서도 시간이 흐른다는 걸 안다. 고난은 결국 끝이 있고, 끝이 보이지 않던 슬럼프도 디가란 선이 반으로 접히면 짧아지듯, 우리 생각보다 짧게 끝맺음을 짓기도 한다. 그리고 펼쳐졌을 때 데칼코마니와 같이 색다른 그림이 또 삶에 이정표가 되어 나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2부에는 이처럼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여름을 보내는 과정, 언덕에 오르는 과정,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으로 인해 끝을 보아야 하는지 말이다.
그의 작은 개는 너무 작아서
어느 날 문득 그의 삶에 끼어들었다
여름이었고
한쪽 눈이 충혈된 채로 그의 더러운 신발을 핥고 있었다.
그는 그날의 첫 만남을 총성에 비유했다
불현듯 작은 개를 끌어안고
이전과 같은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심장을 뚫고 지나간 것이 있기 때문에
그 길은 길의 바깥이 되었다
못이 벽을 파고들듯이
회전하는 여름이었다
그러나 여름은 상하기 좋은 계절이기도 했다
한 존재를 끌어안고 너무 깊이 와버렸기 때문에
자신이 끌어안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대로라면 행복하다고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개의 한쪽 눈은 붉음을 지나 검어지고
급기야 죽음의 손에 끌려가버리고 말았다
그는 개와 함께한 날들의 몇 곱절을 지나 살아남았고
거의 모든 기억을 잃었으며
오직 도래라는 말만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말이 둥글고 따스한 알 같다고 생각한다
기다리면 껍질을 깨고
무언가 태어날 것 같은 말
그의 작은 개는 너무 커서
그의 하늘을 뒤덮고 있다
그의 슬픈 눈망울을 완성하려고
태양은 종종 등을 돌려 얼굴을 가린다
너무 슬펐던 시였다. 시인은 '도래'라는 이름을 가진 강아지를 강아지별에 보냈던 걸까. 유독 안희연 시인의 시집에 '개'를 소재로 한 시들이 나오는데, 반려동물을 키웠는지 그 시들은 모두 시인의 마음이 직접적으로 투영되어 있었다. 시인이 개와의 첫 만남을 '총성'에 비유했듯이 세상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연들 역시 '총성'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뜻밖의 사건과도 같기에. 하지만 언젠가 관계에는 죽음이 찾아오고 남겨진 사람은 흔적을 더듬어야 한다. 작은 개의 죽음은 내 삶에 너무 커서 하늘을 보면 언제나 작은 개가 뒤덮고 있고, 나는 그 슬픔을 감추려 태양이 등을 돌리는 곳에서 얼굴을 가린다. 구절 하나하나가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던 시였다.
덧칠
나는 네가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믿을까 봐 두렵다. 장의차가 지나가는 풍경, 가스 불을 결 때마다 불에 탄 얼굴이 떠오르는 일,
이제 너는 싱그러운 꽃다발을 보고도 메마른 시간을 떠올 릴 것이다, 누구보다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이 되어 세상 모든 발소리를 분간할 것이다, 빛이 충분히 드는 집을 찾겠다 고 이사를, 이사를 하고,
붓과 물감을 사들일 것이다, 나는 네게 환한 시간만을 펼 쳐 보이고 싶은데, 집 안의 시계를 전부 치워버리고, 시간이 일으켜 올릴 싹을 두려워하며, 씨앗 없이 흙을 채운 화분, 그곳에선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기를 것이다.
그러다가도 이따금, 손이 손 모르게 그려낸 얼굴을 마주하곤 놀랄 것이다, 짝이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유령처럼 걸었던 밤길이, 안간힘 썼던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려놓 다는 사실 때문에
폭발음도 없이 한 우주가 잠든 곳,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그러모으는 일, 나는 네가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믿지 않을까 봐 두렵다, 네가 침잠하는 모든 시간에 언제나 한 사람이 곁에 있었는데도
너는 그런 기적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고개를 저으며, 흰 물감으로 또 한 번 얼굴을 뭉갤 것이다, 반드시 흰 물감이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수없이 설명하고 설명할 것이다
참 다정한 시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에, 다정한 우려를 담은 시. 사랑을 떠올렸을 때 '싱그러운 꽃다발'이 아니라 '장의차'나 '불에 탄 얼굴'같은 고통과 슬픔을 먼저 떠올릴까 봐, 계속 이사를 하며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기를까 봐, 유령처럼 이별을 잊으려고 해도 다시 슬픔이 찾아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을 두려워할까 봐 걱정을 한다. 하지만 삶에는 메마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때론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그러모으듯이 조각을 줍기도 하고, 우주가 잠든 것처럼 메마름과 고요함이 공존한다. 사랑에는 밝은 면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면면도 있는 것이다. 어둠과 아픔'만'이 사랑도 아니며 희고 밝은 것'만'이 사랑도 아니다. 비단 사랑뿐 아니라 삶도 그러하지 않는가.
측량
수신인을 알 수 없는 상자가 배달되었다
상자를 열어보려고 하자 그는 만류했다 열어본다는 것은 책임지겠다는 뜻이라고
우리는 상자를 앞에 두고 잠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때 상자가 움직였다 생명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했다 누군가에게 영원히 되돌아갈 집이 된다는 것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자라나는 이파리들을 날마다 햇빛 쪽으로 끌어다 놓는 스스로를 상상했다 기대하고 실망하는 모 든 일이 저 작은 상자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각은 영혼을 갉아먹는 벌레 같았다 작고 하얀 벌레는 순식간에 불어나 온 마음을 점령했다 상자가 움직일 때마다 우리의 하루도 조금씩 휘청거렸고
고작 상자일뿐이었다면 쉽게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잘못 배달되지 않은 사랑이 과연 있을까 더구나 생명이라면
너는 상자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 다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싶었다
3부에서는 이처럼 과거의 흔적을 내가 목격하고, 여름 언덕에 오르는 과정까지 체험한 내가 경험의 결과를 맞이하는 순간을 그린다. <그의 작은 개는 너무 작아서>에는 나의 반려동물과 이별하는 순간을 그리고, <덧칠>에서는 관계가 이별을 맞이하는 순간을 그리며 그럼에도 삶에는 어두운 면'만'있는 것도 아니고, 밝은 면'만'있는 것도 아니어서, 검정과 흼이 모두 사랑이라는 걸 말한다. <측량>에서는 이제 이 미지의 세상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가야 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별과 슬픔을 몇 차례 겪었던 우리에게 '상자'가 배달된다. 누가 보냈는지도 알 수 없는. 이 상자 안에 든 생명체는 어쩌면 내가 다시 새롭게 맞이하는 반려동물일 수도 있고, 새로운 생명 아이 일수도 있다. 혹은 새로운 사랑, 새로운 관계일 수도 있겠다.
내가 상자를 열어보려고 하자, 그는 만류한다. '책임을 질 수 있냐.'면서. 새로운 관계란 그런 것이지 않은가. 내가 이 관계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반려동물에게 내가 온 힘을 다해서 정성을 쏟을 수 있을까, 내가 사랑을 잘 지켜나갈 수 있을까, 내가 책임감 있게 타인에게 의지가 되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미래라는 것은, 새로움이라는 것은 그러한 부담감을 마주하게 된다. 불안이 곧 내 마음을 점령하기 시작하여 나를 휘청거리게 만든다.
그때 그는 '그런데, 잘못 배달되지 않은 사랑이 있을까.'라면서 다가간다. 모든 것이 계산되고 합리적인 관계란 존재할까.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평등하게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하나의 오차도 없는 미래가 존재할 수 있을까. 잘못 배달된 것 같았던, 우연한 만남에 나는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싶다.'라고 말한다. 마치 물을 마시는 것처럼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것과 같이, 좋은 면면만 주고 싶다고. 물을 오염시키지 않고, 물을 침범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상처 주지 않고 사랑하는 법을 알고 싶다는 바람을 담으며 다시 미래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그 불안을 알면서도 다시 미래를 선택하는 이의 용기를 잘 그려낸 시여서 너무 좋았다.
그러니까 시인이 "언덕의 기분"을 살피면서 "물웅덩이"에 "발이 푹푹 빠지는" 한가운데를 직접 겪 어나가는 순간에 찾아드는 "다른 풍경" , "한쪽 눈이 충혈된 채로" "더러운 신발을 핥"는 "작은 개"를 내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깊이" "끌어안"음으로써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상하기" 쉬운지, 또 얼마나 연약한지를 짚어내는 순간, 거기에서 '여름'은 우리가 알고 있던 단어 너머를 향하기 시작한다.
시인은 시인에게 다가오는 갖가지 상황을 피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더욱이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순간 곳곳에 서 알 수 없는 감정이 감지되는 상황을 어떤 고정된 단 하나의 표현으로 매듭지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 알 것 같은' 장악의 순간을 경계하면서, 하나의 말이 가당을 수 있는 끝까지 가보려 한다. "언어만으로는 어떤 얼굴도 만 최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끈질기게".
안희연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고집을 버리고 "더럽혀진" 지금의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삶의 한가운데에 밀착해 들어가 그곳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 끝까지 다툰다. 그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 다 홈처가도 좋아'라고 시인이 말할 때 사용한 훔치다(voler)'라는 동사를 프랑스 사람들은 날다(voler)라는 의미로도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래, 다 날아가도 좋다.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 어딘가로 흘러가는 말들에 힘이 있다고 믿는 시집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 '말들'의 자리에 시인은 슬그머니 '삶'이란 글자를 올려 두기도 할 것 같다. 그게 참 좋은 것 같다.
문학평론가 양경언
문학평론가 양경언의 말처럼 이 시집 속 '여름'의 존재는 우리 삶에서 순간순간 찾아오는 고통일 것이다. 예기치 못한 고통이 어린 '여름 언덕'에서 우리는 다시 고통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기를 택한다.
"도와주세요.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새벽 두세시쯤, 잠결에 아이 목소리를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잘못 들었나.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볼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엄마를 잃어버렸 다는 아이 목소리가 한번 더 들려왔고 누군가 밖으로 나가 아이를 데려가는 기척이 들렸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섬뜩했다. 아이는 왜 하필 그 야심한 밤에 엄마를 잃어버린 걸까. 아니, 아이가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걸까. 사람들에게 간 밤 일을 이야기하자 모두들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가위눌린 게 분명하다고 했다.
한 달쯤 뒤에 나는 이 미스터리의 답을 찾았다. 어느 저녁, 목소리를 다시 들은 거였다. "엄마 보고 싶어"라는 말을 수 십 번 반복하며 서럽게 우는 아이의 목소리. 나는 집 안의 모 든 소리를 차단한 채 목소리의 출처를 찾았다. 맞은편 주택 3층이었다. 창에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비쳤다. 우는 아이를 달래며 옷을 갈아입히는 중인 듯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이 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결코 아이를 다그치지 않았고 조곤조곤 속삭이며 옷을 벗기고 입혔다. 그 장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모르는 게 맞고 알 수도 없을 테지만 알 것 같았다. 아이의 엄마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혹여 오더라도 아주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서글픈 직감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아 이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상상을 한다. 여름 언덕을 오르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흩날린단다. 이 언덕엔 마음을 기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지만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런 언덕이 되어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2020년 7월
안희연
시인의 마지막 말도 좋았다. 밤에 우는 아이를 달래는 어른과,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 시인의 마음. 아이의 고통을 우리가 쉬이 달랠 수는 없을 것이다. 삶에서 계속해서 마주해야 할 고통도 우리가 많이 덜어주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같이 손을 잡고 여정의 길을 올라 신선한 바람이 있다는 것을, 밝은 면면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곁에서 꼭 알려줄 어른이 있다는 바람을 보낸 시인의 말에도 깊은 여운이 스며들었다. 여름에 꼭 한 번 읽어보아야 할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