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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DNA

2025.06.10

by 김채미














요즘 사회가 갈등이 치닫고 있기 때문인가, 이상하게 유튜브 알고리즘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걸려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첨예하게 토론을 하는 영상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에서 인상 깊었던 영상이 있어 이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전에 혼자 일기장에 끄적여보았던 행복의 조건에서 더 나아가 인간이 선천적으로 행복을 더 잘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건 무엇인가, 행복을 결정하는 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영상 속 썸네일 제목은 '유전자'라고 확정 지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영상을 보면 그렇지 않다. 유전자의 영향이 분명 결정하지만, 그것만 행복이라고 결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기존에 우리들이 깊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내용이 많아서 너무 흥미로웠다.




일반적으로 행복함을 더 잘 느끼도록 하는 요인은 40-50%이고 이 나머지는 E라고 한다. E는 Environment, 즉 환경적 요인이라고 기술하는데 이게 편의상 환경적 요인이라고 한 것이지 실제로는 '유전적 요인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값의 모든 것'이다. '환경적 요인'만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경이 아니라 환경이 아니라 대부분 70-80%의 모든 것은 우연이다. 내가 살면서 누구를 만나는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게 이만큼이 아니라 실제로 차이를 내는 건 아주 극미소한 것들, 살면서 갑자기 우리 집에 불이 나고, 누구를 만나 결혼을 하고, 이런 것들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우연적인 요소들로 만들어진다. 이런 수만 개의 변인의 합이 E(환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유전은 하나의 값인데 나머지 수만 개의 요소의 합인 E의 크기가 비슷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하나의 유전 값의 크기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말해주는 것이다.


이를 일반적인 심리학 서적에서는 '환경적 요인'이라는 사실만 강조하여 내 내면을 다스려야 한다, 시선을 바꾸고 행복한 요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며 이야기를 하지만,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1:1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전적 요인 하나의 값이 수많은 변수와 수많은 요인을 다 합친 값과 대등하다는 소리다. 한 마디로 유전적 요인 1의 값이 50여 개의 여러 요소와 대결을 하고 있는 셈이니 유전적 요인의 힘이 얼마나 센 것이다. 심리학 서적에서 이야기하는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희망고문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다 행복을 느끼는데 나는 왜 아니지? 하고 한계나 회의감이 분명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변화할 수 없는 것이냐, 그건 아니다. 유전적인 것과 변화 여부는 다른 것이다. 선천적으로 누군가 먼저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빠르게 뛸 수 있다. 하지만 같이 연습하면 빨라진다. 다만 먼저 쉽게 배우는 유전적 요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감정의 요인은 무엇인가. 감정은 내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외적인 환경에서 도화선이 된다. 예를 들어 사자가 나오면 공포스럽지 않은가. 이처럼 외부적 요인이 바뀌거나, 내가 어떤 상황을 마주했을 때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예전 심리학에서는 바깥 요인을 다 무시하고 내면을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정서적인 시스템이 작동을 못한다.


다만 감정이 적재적소에 변별력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 불안이 사자를 보면 나와야지 컵을 보고 나오면 안 된다. 즐거움이라는 감정도 신발을 보았을 때, 지나가다 마이크를 보았을 때가 아니라 어떤 외부적 환경에 의해서 나와야 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도망가야 한다는 신호다. 사자를 보았는데도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감정이 잘못 작용을 하는 것이고, 인간 생존과도 결부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다 죽었다. 그런 것처럼 즐거움도 생존에 필요하기 때문에 나오는 감정이다. 부정적인 감정과는 반대로 어떤 상황을 마주했을 때 가속 페달을 밟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되돌아가고, 도망가는 거라면 긍정적인 감정은 재생산을 유도하고, 만사를 제치고, 기대하게 만드는 거다. 그리고 이 요소 중 가장 큰 것은 사람이다.


인간은 사람을 대할 때 즐거움이라는 긍정적인 감정이 많이 켜진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사람 때문에 죽고 산다. 남한테 자랑하려고 명품을 사는 것이고, 나의 사회적 가치를 높게 받고 싶어서 승진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장 나약한 존재로 추락할 때가 언제일까. 협업이 잘되지 않을 때, 내가 고립되고 왕따를 당할 때다. 그게 제일 겁이 나는 상황이다. 생존에서 가장 멀어지는 행위기도 하니까. 인간은 관계가 끊어져 나가면 죽는다. 고대부터 홀로 살았던 사람들은 생존하지 못했다. 홀로족들은 생존에 버겁다. 즉 인간의 생존 필수품은 사람인 거다.


이걸 어떻게 DNA와 연결 지을 수 있냐 하면, 그렇다면 선천적으로 사람과 잘 만나고, 잘 어울리고, 쉽게 친해지는 사람이 행복감을 더 자주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향적인 사람은 압도적으로 자주 행복하다. 그렇다고 내향성이 덜 행복한 건 아니다. 불행한 게 아니고 덜 행복할 뿐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자주 행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개인차가 있다는 것일 뿐.


그리고 전문가가 보기에 어떨지 몰라도 행복감은 본인의 평가가 중요하다. 외상이나 우리 신체에 이상이 있는 것은 엑스레이나 MRI로 촬영을 하여 의사가 진단을 한다. 하지만 행복함은 기계적으로 수치를 잴 수 없다. 그렇기에 개인이 느끼는 행복감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요즘에는 '주관적 안녕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자는 말도 나온다. 개인이 느끼는 행복감의 수치에 시비를 걸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는 야망이 커서 큰 자리를 차지해야지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시골에서 낚시를 하면서 즐기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행복감에 개인차가 존재한다. 그것에 왈가왈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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