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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3:00 자몽에이드, 유일한 씬(scene)

by 지서원






몇 년 전, 상경하고 2년쯤 지났나. 아마도 평소 하고 싶었던 의류 마켓 운영을 위해 동대문 밤 시장에 다닌 시절이었을 것이다. 저녁나절에 잠들었다가 밤 12시에 일어나 152번 버스를 타고 꽤 달리면 동대문 도매시장에 도착했었다. 그걸 몇 번 반복하니 밤낮이 바뀌어 한동안 고생을 했다.


시장에 가지 않는 어느 새벽녘, 초저녁에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애매하게 깼다. 노란 할로겐 스탠드가 고요하고 엄숙하게 가라앉은 어둠과 묘하게 얽혀있었다. 차도 다니지 않는지 창밖엔 정적이 흐르고. 이 세상에 나 혼자인 것만 같고.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겠고. 머리는 부스스 하고 보일러 튼 방바닥에 지져진 내 등짝은 뜨끈뜨끈 했는데. 불현듯 지금 자몽에이드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하고 톡 쏘는, 상큼달달하고 끝맛은 씁쓸한. 핀 조명을 탁 하고 켠 듯 정신이 돌아올 것 같은 맛. 주섬주섬 아우터를 껴입고 편의점에 갔다. 시간은 새벽 3시. 쌀쌀한 공기는 잠잠했고. 역시나 도로는 조용했고. 저를 봐주는 이 없는 신호등은 하릴없이 깜빡 깜빡. 아포칼립스 한가운데에 살아남은 생존자인 것 같아 스산했지만 곧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만나니 유치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운 좋게 자몽주스를 발견했고 탄산수와 함께 구매했다. 찜질방처럼 데워진 집에 들어와 창문을 열어 찬바람을 초대한 후 텀블러에 자몽주스와 탄산수를 적정비율로 섞었다. 쭈욱 들이킨다. 카페에서 마시던 진한 맛은 나지 않지만 아, 살아있음이 느껴졌다. 집 안은 노란 조명빛으로 가득했고 바닥은 따끈했고 창문을 타고 넘어온 공기는 찹찹하니, 붉게 익은 내 뺨을 기분 좋게 때렸고 급하게 만든 자몽에이드는 흡족. 세상은 평온. 난 혼자가 아님. 그 후 어쩌다 새벽에 깨는 날이면 편의점 발 자몽에이드를 마시고 싶어진다. 몇 번 시도해 보았는데 아쉽게도 그 날 그 감동이 느껴지진 않았다.


역시나 그때가 유일한 씬(scene).

그래서 더더욱 강렬하고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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