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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daal Aug 22. 2023

오늘도 결론은, 떡볶이

narrative_recipe: 나를 어르고 달랠 묘책

호주로 돌아온 지도 벌써 8개월이 지났어. 집을 구하는데 정말 애를 먹었고 여럿의 도움으로 빌린 집에서 이미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어. 마치 사람을 알아가듯 집도 알아가고 있어. 언제 빛이 들어오는지, 어떤 소음들이 있는지, 가스불 조절할 때 다이얼을 얼마큼 돌려야 하는지. 이런 작은 것들을 알게 되면서 나는 이 공간과 가까워지는 걸 느껴.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부엌인데 아일랜드 조리대가 있어서 요리가 참 즐거워. 게다가 입맛이 똑 닮은 이웃이 아래층에 살다 보니 음식이 남을 염려 없이 듬뿍 만들어서 나누고 나면 요리의 기쁨이 배가되지.



서울에 있는 요리 친구 혜란에게 한 약속은 참 많지만, 그중에 하나는 청펀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볶음국수를 해 주겠다는 거야. 청펀은 쌀가루와 전분, 그리고 소금을 넣어 쪄서 익힌 후 계란말이하듯 돌돌 말아서 만드는 국수인데 물론 이런 수고는 마다하고 식품점에서 한 봉지 사 오면 요리의 80%는 완성된 셈이야.


볶음국수의 비밀병기는 Dark Soy Sauce와 일반 간장을 1:1로 섞고 설탕과 요리술을 넣어 만든 소스인데 나는 이게 그렇게 맛이 있더라고. 게다가 Dark Soy Sauce는 음식의 색을 더욱 맛있는 색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나의 뽐내기 수위는 점점 올라가지.


지금까진 중식이었는데 마지막에 타이 바질을 한 줌 넣느라고 국적이 태국으로 바뀌었어. 중국국수, 타이바질, 한국고추장 삼위일체! 그리고는 '타이식 볶음요리'라는 제목을 달아 포스팅을 했고, 그 사진을 본 혜란에게 곧장 메시지가 왔어.

'타이식 떡볶이야?'


생리기간, 그리고 그 전과 후가 되면 나는 피곤, 우울, 두통, 무기력의 원인을 모두 생리 탓으로 돌리지. 배란기간까지 포함하면 한 달에 반 이상을 생리 탓을 하며 보내는듯해. 마찬가지로, 야식을 먹고, 극도로 매운 걸 먹고, 아이스크림을 한 통 먹을 때조차도 이래도 된다며 생리를 통해 내 모든 탐욕을 합리화시키곤 하지.



"타이식 떡볶이야?"라는 혜란의 메시지를 받은 건 밤이라고 하기는 모호한 저녁 8시였고, 나는 생리 변호사를 앞장 세워 이미 침대에 있었어. 평소에는 내리지도 않던 블라인드는 바닥까지 내리고 핸드폰도 뒤집어 둔 채로 내 몸도 침대에 뒤집어 두었지. 그러다가 갑자기, '그래! 청펀으로 떡볶이를 만들어 보아도 좋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미라가 깨어나듯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지.



간장 1, 다크소이소스 1, 고춧가루 1, 미림 1, 고추장 1, 메이플시럽 1을 작은 종지에 섞어서 두고, 마늘 두 알을 아주 작게 썰어. 팬에 마늘과 양파를 볶다가 어느 정도 향이 올라오면 양배추, 청펀을 넣고 조금 더 볶아. 그리고 소스를 넣고 1-2분 뒤적뒤적하니 침이 고여. 왜 1:1인지 묻는다면 ‘쉬우니까’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어.



내가 만들었지만 너무 맛있다 얘.

이것은 엄마가 자주 쓰는 표현인데, 오늘은 옆에 아무도 없어서 뱉지 못한 한마디가 되었기에 글로라도 남겨야겠다 싶어. 내가 만들었지만 너무 맛있는 거야. 이 또한 beginner's luck일 수 있지만 내일 날이 밝으면 5층 이웃에게 어서 한 그릇 가져다주며 뽐내고 싶어 나는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생리의 결과물은 또 떡볶이가 되었고, 나는 내가 나 자신을 어르고 달랠 수 있는 음식이 있다는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해. 마치 설날에 떡국을 먹어서 한 살을 더 먹는 게 아니듯이, 동지에 팥죽을 먹었기 때문에 내게 악귀가 찾아오지 않는 게 아니듯이, 떡볶이와 나의 질병 간에 어떤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나는 이런 믿음들을 통해서 주문을 외우듯이 나를 어르고 달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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