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tdaal Apr 06. 2023

숙주와 콩나물, 유전자 속에 있는 음식들

narrative_recipe: 별책부록

나는 때때로 내게 초능력이 있나 싶은 순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체했을 때야. 그날 한 가지 음식만 먹은 것도 아닐뿐더러 재료도 여러 가지가 들어있는 음식들임에도 나는 이 기분 나쁨의 원인을 '이거!'하고 잡아낼 수가 있어. 세상에서 아보카도와 연어의 조합은 천재적이라고 생각했었던 나이지만 그날 이후로는 아보카도, 연어, 계란은 초성만 떠올려도 참담한 기분이 들었고 때마침 떨어진 면역력 탓인지 감기 기운까지 있어서 '아 이렇게 죽는 거구나.' 하며 이틀정도를 보낸듯해.


현미밥, 가지구이, 스노우피, 그리고 숙주. 요리랄 것도 없이 가지는 올리브유에 굽고 숙주는 들기름 소금을 넣어 살짝 볶았다.


아직은 세상에서 할 일이 더 남아있다는 뜻이었을까? 이런저런 음식들을 떠올려 보았어. 마치 노래방에서 리모컨으로 아는 노래가 나올 때까지 뒤적뒤적하듯이 머릿속에서 내가 아는 온갖 음식을 떠 올려보았어. 흰 죽도 못 먹겠던 나는 번개처럼 콩나물국이 머릿속을 스쳤고 같이 사는 이에게 콩나물을 사다 달라고 주문을 했지. 밤 9시가 넘었기 때문에 내일 오전에 사다 준다는 말에 내가 제대로 된 몸뚱이였다면 버럭 화라도 냈을 텐데 그럴 힘조차 없었어. 지금 생각해도 배신감 드는 말이 맞아.


그 '내일'이 왔고 콩나물을 사다 주긴 했어. 심지어는 소금만 넣고 끓여주기 까지 했는데 왠지 시든 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거야. 머리는 어디 갔지? 머리를 다 제거했나? 아니면 신선하지 않아서 그런가? 그러다가 알았어. 숙주를 사 왔다는 걸. 쑥과 쑥갓이 서로 다른 거라는 걸 모르는 친구에게 놀라지 않은 척하느라 숨죽였던 때처럼 나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다물었어. 그래, 모를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콩나물이 필요해.


무언가라도 먹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고 그렇게 힘이 조금 생기자마자 나는 콩나물을 사러 갔어. 그리고는 콩나물 국으로 세끼를 먹었어. 그러면서 생각했어. 어떻게 몸은 알고 있을까? 내 몸과 정신은 분명 따로일 거야. 몸이 원하는 걸 정신이 알려주고 있는 듯했어. 아니면 유전자 속에 콩나물국이 존재하는 걸까? 내가 먹고 자란 것. 어렸을 때 엄마가 끓여 주던 맑은 국. 문화적 유전자일지도 모르겠어.


음식에 대한 경험을 그래서 참 중요해. 내가 나에게 처방해 주는 묘약. 나는 감기기운이 있을 때 아주 매콤하고 따뜻한 순두부찌개를 먹어. 하지만 속이 안 좋을 때는 콩나물 국을 먹어. 스트레스가 심할 때 먹는 음식, 기분이 좋을 때 먹는 음식, 이렇게 내 유전자 속에 메뉴판이 하나 있어서 언제든 꺼내 볼 수가 있어.


마른 두부는 마치 쫀득한 어묵처럼 구워졌다. 약간의 간장으로 조려내니 감칠맛이 좋다.

기분에 따라 음식을 고르는 울보는 질병에 따라 또 음식을 골라. 그리고 나는 친구들을 위한 메뉴판도 가지고 있어. 아플 때 카프리선을 마시는 혜령이랑 쉬는 날 빵과 과자를 먹는 혜란이랑. 너희들의 말속에서 좋아하는 것 안 좋아하는 것들 모으고 모아서 너희를 위한 메뉴판을 만들고 있어.

이전 11화 난 음식 쓰레기통이 아니라고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