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요압의 역할은 누구였나 하는 것이다.
'시편 9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아들의 죽음’ 이란 곡조에 맞춰 부른 다윗의 노래)
시는 함축적인 언어다. 숨기고 가림으로써 의미를 더욱 확장시키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시인의 의도를 빨리 확인하고 싶은 나 같은 사람은 시를 읽을 때 제목을 먼저 본다. 오늘 시편의 소제목은 '아들의 죽음'이란 곡조에 맞춰 부른 다윗의 노래다.
'아들의 죽음', 누구의 아들일까?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죽음이다. 압살롬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을 넘어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왕위를 빼앗는 반역을 도모했다. 당장 다윗을 추격해 죽여야 한다는 아히도벨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보면 다윗을 죽이고자 이 악물고 달려들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게 믿고 싶다.)
아버지 다윗도 마찬가지다.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 피치 못하게 궁에서 도망쳐야 했지만 아들이 죽임 당하기를 원치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압살롬이 왜 저렇게 비뚤어졌는지 이해도 되고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식이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차라리 자신이 죽기를 바랐을 것 같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요압은 나뭇가지에 걸린 압살롬을 죽였다. '12 살인자에게 복수하시는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들을 기억하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시지 않으리라' 시편 9편 전체에서 아들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어 보이는 구절이 여기뿐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군주로서 말해야 하지만 또한 한 아버지로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다윗과 압살롬, 그 이외에 떠오르는 '아들의 죽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죽음 밖에는 없는 듯싶다. 압살롬이 죄인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의인이셨다. 아니 완전한 선이셨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반역자인 아들 압살롬을 살리고 싶어 했다.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의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그 가운데 죽임 당하는 역할로 아들을 내세우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아들을 살리고 싶지 않으셨을까?
문제는 요압의 역할은 누구였나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든 일을 설계한 대제사장 무리였나? 그들에게 현혹돼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였나? 대제사장 앞마당에서 예수님에 대해 거짓 증언한 이들이었나? 그런 예수님을 모른다고 외면한 베드로였나? 죄가 없음을 알고도 바라바를 놓아준 빌라도였나? 예수님을 온갖 고문도구들로 매질하고 창으로 찌른 로마 군인들인가?
아니면 이 모든 과정을 들어 알고도 예수님의 죽으심에, 자기 부인에 동참하지 않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