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일'이 직업인 사람이었습니다만...
서점에 갈 때면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들은 요즘 주로 어떤 고민을 하는지, 그 고민을 해결하고자 뭘 찾는지, 또한 어떤 것들에 갈증을 느끼며, 그걸 채우려 무엇에 관심을 쏟는지... 한 자리에서 전부 확인할 수 있어서다.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보면 드는 또 하나의 생각. '참 별의별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는구나', '이런 책은 나도 쓰겠네' 따위의 오만한 착각이 스멀스멀 인다. 책 한 권을 들어 책장을 넘겼을 때 한 페이지를 채우는 글자 수조차 적으면 마음속 오만함은 '그것 보라'는 듯 바짝 고개를 든다.
다행히 서점 밖을 나오는 순간, 그런 오만함은 자취를 감춘다. 사실은 나만의 글을 쓰는 행위가 얼마나 오랜 망설임과 시행착오, 지난한 싸움의 숭고한 결과물이라는 걸 누구보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시간이 남긴 후유증은 생각보다 깊고 넓다. 주로 전달자의 역할에 머물렀던 탓이 크다.
매일매일 내 글은 쏟아내면서도 점검할 여력이 없다는 핑계로 좀처럼 뒤 돌아보지 않았고는, 정작 남의 글은 갖가지 잣대로 평가하기 바빴다. 간혹 아주 두꺼운 책에서 오타라도 하나 찾아낼라치면 유치한 희열까지 솟아났다. 글의 깊이보다 시의적절함을 빙자한 속도에 몰두한 나머지 쓰는 일 자체가 끝 모를 공허함을 몰고올 때도 잦았다.
무엇보다 쓰는 일은 희한한 '갈증'을 유발한다. 매일 뭔가를 쓰는데도 풀리지 않는 갈증의 근원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지 않다'는 자각에서 기인했다. 물론 그런 자각만으로 당장 갈증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쓰고자 하는 글이 대체 뭔지... 연기처럼 뿌옇게 머릿속을 채운 막연함을 구체화하는 과정도 필요했다. 그걸로 해소된다면 좋으련만. 그다음은 단련의 시간이다.
'쓰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하는 나에게, 그동안 만난 숱한 작가들이 내놓은 처방은 대부분 비슷했다. 일단 '한 줄'이라도 써 보라고. 시나리오 작가, 드라마 작가, 심지어 대중음악 작사가들조차 답변은 같았다.
그들이 던진 '한 줄 쓰기'는 글을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팁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떤 글이든 한 문장을 쓴다면, 그 자체로 나만의 글은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어느 작사가는 또 이런 말도 건넸다. 쓰는 게 너무 막연하게 느껴진다면 '오늘 아침은 쌀밥 대신 현미밥을 지어먹었다'는 류의,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라고. 처음엔 시시한 조언이라고 치부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껏 잊히지 않는 말로 남았다.
운 좋게, 일하면서 영화나 드라마 작가들의 작업 방식을 가까이 엿보는 기회도 많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장르를 불문하고 어떤 글이든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이었다. 비현실에 가까운 범죄영화도, 이 세상에서 절대 일어날 리 없는 판타지의 세계도, 처절하리만치 애틋한 사랑 이야기도, 여지없이 글을 쓴 작가들의 경험이나 가치관에서 모티브를 삼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로 출발해 소재를 더하고, 장르로 확장해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도 비슷했다.
과연 글을 잘 쓰는 방법이란 게 있을까. 여전히 답은 찾을 순 없다.
그럼에도 직업인으로서의 쓰기를 멈추고 '다른 무언가'를 쓰기로 결심한 순간,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행위의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막연한 이미지와 단어들이 부유하는 머릿속을 정돈하고 일단 한 문장이라도 써 내려가는 일은... 진짜 나를 마주하고, 그런 나를 세상에 꺼내 보이는 길인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쓰는 사람'이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